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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1년을 지내며(6)
- 2015년 6월 23일부터 2016년 6월 23일


글 김형호 미카엘 신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목

 

즐기는 불편으로: 9월 15일

참 당연한 것들이 많았다. 스위치만 켜면 언제든 정전 없이 전기가 들어오는 나라, 바람 쐴 거리들이 많은 나라, 수도꼭지만 틀면 깨끗한 물이 콸콸 쏟아지는 나라, 갑갑할 때 좋아하는 것들을 적잖게 즐길 수 있는 나라, 더위와 추위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나라, 계획해 준비하면 새로운 도전을 해 볼 수 있는 나라,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 누릴거리들이 다양한 나라, 신뢰 받는 조국이 있는 나라, 인터넷을 통해 보고 찾고 누리고 소통하고 즐기며 성장할 수 있는 나라, 힘겨움과 복잡함을 지고서라도 자유롭게 오를 산이 많은 나라, 갑갑함을 잠시나마 떨쳐 버릴 수 있는 트인 바다가 있는 나라, 혼자든 동행이든 여행할 수 있는 나라, 전쟁의 위험은 있지만 지켜낼 힘이 있는 나라, 돈만 충분하면 더 바랄 것이 없는 나라, 부족해도 누릴 것들이 적지 않은 나라, 없으면 많이 힘겹지만 그래도 기본적 누림이 있는 나라. 그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참 좋은 것들이 많았다 싶다.

 

물론 훨씬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겠지만 지금보다 더 누릴 수 있는 기본적 보장이 충분한 나라를 만들어야겠지만, 지나친 경쟁 속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긴장해야 하지만 사람보다 일과 돈과 권력이 더 힘쓰는 나라에 힘내서 살아야 하지만 잠시 정신없는 가운데 누렸던 편리함을 돌이켜보니 참 고맙고 감사했다는 생각이 든다. 참 좋은 내 나라 대한민국.

불편함, 이는 단지 ‘불편함’뿐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니 이것도 익숙해진다. 즐김의 꺼리들이 많지 않은 곳에서 편리함을 어쩔 수 없이 밀쳐두니 불편함 너머에 있는 그저 사는, 함께 살아가는 고마움이 자리 잡는다. 당장 안 해도 되지만 언젠가는 챙겨야 하는 것들, 마구 달리는 관성 속에 지나가 버린 행복, 높은 곳만 바라보다 여태 누리지 못한 기쁨, 파묻힌 일로 인한 날카로움으로 상처주며 살았던 그 사람의 소중함. 결코 바쁘지 않은 곳에서 자리 잡은 여유로움은 일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게 한다. 물리적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내면의 빛을 들여다보게 한다. 없는 불편함보다 누린 기쁨을, 사는 행복을 부여잡게 한다. 익숙해진 편리함으로 망각한 지금 누리는 즐거움을 눈뜨게 한다.

 

민감한 소리: 9월 29일

대천사 축일, 차분히 맞는 영명축일이다. 몇몇 분들의 축하메시지와 같은 소임을 하는 한국인 선교사(신부님, 수녀님)들의 축하전화를 몇 통 받았다. 물론 멀리서 기도로 축복해주는 분들도 있겠지만 서품 이래 이렇게 바쁘지 않게 축일을 보내긴 처음이다. 나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요 며칠 총소리를 자주 듣는다. 연습 사격이 아닌 전투 총소리를 가까이에서 듣는 것은 처음이다. 밤새 10여 발의 총소리는 이미 여러 번 들렸는데 며칠 전부터는 수류탄과 함께 다발적인 총격전이 주변에서 계속 벌어진다. 주변 나라의 용병과 몇몇 부족들의 야합으로 쿠데타를 성공하고 머지않아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난 나라. 나라간 종교간 민족간 서로 얽히고설킨 보복의 연속, 쉽게 풀어내기 어려운 살상과 보복의 사슬을 어떻게 풀어낼지 걱정이다. 1만 6천 명의 UN군도 선과 악,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선명하지 않으니 쉽게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일어난 상황을 정리하고 확산을 막으려고 애쓰는 정도다. 이 와중에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서 가방에 여권과 중요한 물품들을 챙겨두라는 조언을 들었다. 총소리를 피하려고 음악을 틀어 놓고는 몇 가지를 챙겼다. 오후엔 대천사 축일을 맞아 이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며 시작한 9일 기도의 마침미사가 있었다. 9일 내내 기도한 사람들, 아침미사를 이미 드린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순수하고 신앙이 깊은데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지….

 

평화를 위한 미사를 드리는 가운데 탈출(?)하기 위한 가방을 꾸려두는 이중적인 태도와 현실. 잠시지만 머리가 아프다. 살기 위해 항상 무언가를 챙겨야 하는가?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여태껏 그렇게 길들여졌다. 문득 ‘며칠 후 하늘나라로 떠나게 된다면 무엇을 챙길까?’하고 생각했다. ‘못다 한 사랑을 챙기겠지. 용서를 청하겠지. 정리하겠지. 내려놓겠지. 기도하겠지….’ 잠시 정신적 혼란을 접어두고 비스듬히 의자에 앉으니 천장에 거미 한 마리가 보인다. 그 어떤 소리에도 미동치 않고 망중한을 즐긴다. 오랜 시간 혼신의 힘을 다해 줄을 쳐 놓았으니 먹을거리를 마냥 기다리는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내가 정하는 시간이 아니기에 그저 할 일을 성심껏 해 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미리 떠날 짐을 싸 놓는 것 또한 소명의 삶에 대한 정성이라 생각해보지만 왠지 편치 않다. 그저 주어지는 것들을 품으며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시간이다. 이곳에서 난 어떤 사랑을 살고 있는가? 오늘, 그 사랑을 어떻게 품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