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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과 함께 살아가기
가시고기


글 이관홍 바오로 신부 | 가톨릭근로자회관 관장

『가시고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은 한 가난한 시인이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눈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끝내 자신은 홀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가시고기는 부성애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 온전히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알이 머물 집을 만들고 알이 부화할 때까지 그 곁을 지키고 있다가 알이 부화할 때쯤이면 갓 알에서 나온 새끼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 홀로 돌 틈에 머리를 박고 조용히 죽어간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이 물러가고 따뜻한 봄이 찾아오기 시작하던 지난 2월 말, 가시고기 같은 필리핀 노동자 C씨가 저희 회관을 찾아왔습니다. 11시 미사에 참례하고 저녁 무렵까지 회관 마당을 서성이던 C씨에게 회관 직원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는 서툰 한국말로 “몰라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물어봐도 “몰라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는 곳을 물어봐도, 일하는 곳을 물어봐도 “몰라요.”라는 대답만 되풀이하면서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C씨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쓰고 있던 휴대전화의 비밀번호였습니다. 휴대전화로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에게 화상채팅을 연결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웠던 것은 휴대전화에 아들과 딸의 얼굴이 나오자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자식들의 얼굴조차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일단 안정을 시키고 다른 필리핀 사람에게 오늘 하루만 집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면 월요일에 병원에 데리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직원들과 함께 논공에 있는 필리핀 공동체로 미사를 봉헌하러 떠났습니다.

 

미사가 끝날 무렵, C씨를 데리고 갔던 필리핀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C씨가 몸을 심하게 떨고 얼굴이 보라색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일단 근처 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하고 저희도 그 병원으로 급하게 출발했습니다. 논공에서 병원으로 가던 중 다시 전화가 와서 큰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근처에 있는 큰 병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병원 응급실에서 만난 C씨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병원비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안정 되었으니 병원비가 조금 저렴한 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다시 C씨를 데리고 뇌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작은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역시나 병원비가 문제였습니다. 미등록 체류자(불법 체류자)의 신분이었기에 의료보험도 안 되고 누군가가 병원비를 지불하겠다는 보증을 서주어야만 진료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일단 제가 보증을 서고 CT촬영부터 시작해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직원들과 저는 초조한 마음으로 검사 결과를 기다렸고, 새벽 1시가 다 되어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검사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미 뇌경색이 시작되었고, 혈관성 치매도 함께 왔다고 했습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큰 뇌수술을 한 흔적이 있다는 말에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2008년 한국에 와서 공장에서 일하던 중 2009년경 공장 사람들과 다투다 야구방망이에 머리를 맞아 수술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기억이 다시 돌아오거나 상태가 호전될 수 없고 더 이상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입원을 시킨 뒤 필리핀 공동체에 부탁을 해서 밤새 간호할 사람을 남겨두고 새벽녘에 직원들과 저는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다음 날 필리핀에 있는 아들과 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아버지는 더 이상 한국에서 일을 할 수 없으니 이제 필리핀으로 돌아가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C씨가 기억도 없고 상태가 호전되기까지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하는 상태이므로 저희 근로자회관 직원들이 수소문을 해서 일하던 공장에 퇴직금과 월급을 청구하고 숙소에서 짐을 정리하였습니다. 거의 매일 병원을 오가며 C씨의 상태를 확인하고, 출입국 사무소에 가서 자진출국 신청을 하고, 필리핀으로 보낼 짐을 싸서 소포로 부쳤습니다. 한 달 가량을 입원한 뒤 C씨는 저희 필리핀 상담사 선생님과 함께 고국으로 향했습니다.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가족들을 위해 일했던 C씨의 한국생활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아직까지 치매가 오기에는 이른 50세의 나이에 힘들었던 한국생활에서 유일한 기쁨과 보람이라고는 술과 담배였고, 매달 가족들에게 월급을 부치는 것이었습니다. C씨의 지갑에는 가족들의 사진과 송금 확인증이 가득했습니다. 저희 근로자회관의 필리핀 상담사 선생님은 출국하는 순간부터 가족들과 만나는 순간들을 사진으로 보내왔습니다. 아들과 딸을 보고도 반가운 내색보다는 어리둥절해 하고 딸이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맞이하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금전적인 문제를 비롯해서 시간적으로도 저희 근로자회관의 입장에서 C씨는 큰 부담이었습니다. 가족들이 아버지의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C씨의 퇴직금과 월급도 치료비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병원을 찾아서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며 한 달을 모든 직원들이 틈틈이 C씨를 돌봤습니다. C씨에게 저희 근로자회관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서진 몸을 일으켜 세워줄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기억력은 사라지고 눈앞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몸에 이상이 생기자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도움을 청하러 근로자회관을 찾았고, 회관에 와서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난 다음 희미하게 남은 기억마저도 사라져 버려 회관 마당을 배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마지막 힘을 다해 근로자회관을 찾았던 C씨는 가시고기처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줬기에 참으로 소중하고 고마운 손님이었습니다. 이제 가족들과 함께, 아들과 딸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 받으며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