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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인 가족찾기 프로젝트
미국 입양인 에린 와서맨(Erin Wasserman, 한국이름: 김희자)


글 김 데레사 수녀 |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수녀원이 시작된 1915년 이래 백백합보육원을 거쳐 입양된 수많은 해외입양인들이 성장하여 자신의 친가족을 찾기 위해 모국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도 수차례 해외입양인들이 감동적인 친가족상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해주신 <빛> 잡지 형제자매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아직도 상봉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에린 와서맨(Erin Wasserman) 씨는 미국으로 입양된 지 42년 만에 미 앤 코리아 모자이크투어(한국 입양인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 사람들과 교류하며 친가족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를 통해 지난 여름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한국을 방문, 대구의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를 찾아왔다.

“제 이름은 에린 와서맨이고 나이는 42살입니다. 저는 태어난 지 1년 만인 1974년 미국으로 입양되었습니다. 너무 어릴 때여서 한국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제 한국 이름은 김희자입니다.”

백백합보육원 서류에 의하면 와서맨 씨는 1973년 12월 11일 오후 1시 대구시 아동상담소를 통해서 백백합보육원에 맡겨졌다. 아동카드에는 보육원에서 지어준 ‘김희자’라는 한국이름과 추정된 생년월일인 1973년 3월 3일이라는 기록이 있을 뿐, 친가족을 찾을 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다. 이듬해 와서맨 씨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 뉴욕의 시라큐스 시의 한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양부모님에게는 3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아이는 자폐아였습니다. 양부모는 제 밑으로 브라질 여자아이를 또 한 명 입양했습니다. 양어머니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고 저를 학대했습니다. 저는 17살 때 집을 나와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두 군데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자립했습니다.”

장학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와서맨 씨는 시라큐스 대학에 진학해서 간호학을 공부했다. 중환자실 전문이며 심장수술 간호사로도 일한 지 20년째, 결혼해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와서맨 씨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덜함에서 살고 있다. 양부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대부분의 입양인들과 달리 와서맨 씨는 양부모를 떠난 후 거의 연락을 안 하고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입양관련 서류는 물론 한국과 관련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딸이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나 자신에 대해 한 번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그때 제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아이들에게 한국에 대해 알려주려면 제가 먼저 저 자신에 대해, 그리고 한국에 대해 배워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인식한 그녀는 출생에 관한 단서라도 찾고 싶어 애태우며 시청과 경찰서를 찾아 다녔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막막하고 절망스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와서맨 씨가 양부모를 떠나 생계비를 벌며 10대에 경험했을 생에 대한 막막함을 40년 만에 찾은 모국에서 다시 경험하게 만드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제 친부모님이 어떤 분들인지, 제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 아이들에게도 제가 태어난 나라 한국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고 싶습니다."

혈육에 대한 그녀의 목마름이 하루 빨리 해소되기를 기도해본다.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대구관구 백백합보육원 입양인 지원 T. 053-659-3333

김 데레사 수녀 : spct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