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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 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 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 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 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 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 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 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주일 복음 묵상

 

5월 7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 요한 10,1-10.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주님은 당신을 양을 치는 목자라 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당신을 양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착한 목자인지는 당신의 양들을 그분이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보면 아주 잘 드러납니다. 목자이신 그분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문지기는 그분을 맞아들입니다. 목자인 그분은 당신 양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릅니다. 그리고 그분의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다 알아듣습니다. 목자는 그 양들 앞에 서고 앞장서 갑니다. 그리고 양들은그를 따라갑니다. 양들이 그분에게 가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풀밭으로 인도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의 모습을 그려내는 오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도둑과 강도입니다. 이들은 문이신 주님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담을 넘어서 양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양들이 낯설어합니다. 양들은 이 도둑과 강도를 피해 달아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양들을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주님과 당신의 양들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도둑과 강도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인물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문지기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이 인물이 하는 일에 대해서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그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준다고 오늘 복음에 아주 간략하게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에 딱 한 번 등장하는 이 인물을 한 번 상상해보면 아주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목자가 오면 문을 열어줍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그는 늘 목자가 오는 것을 살펴야 합니다. 그는 양들보다 먼저 그 목자가 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목자와 도둑과 강도를 분명히 구분하고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없을 때 그는 문을 닫아 걸고 있습니다. 그가 평소에 하는 일은 목자가 없을 때 양을 목자 대신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목자가 아닌 도둑과 강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사람입니다. 그는 도둑과 달리 양들을 조금도 해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양들이 목자를 받아들이도록 온 힘을 다 쏟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목자의 목소리를 들은 양들은 목자를 따라 간다고 합니다.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그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자세가 하느님이 불러주신 자리에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 목소리만을 듣는 것은 내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지울 따름입니다. 부족하디 부족한 자신의 모습에서 스스로 삶에 한계를 정하고 넘지 못할 금을 긋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무엇을 통해 들릴까요? 신학생들과 성체조배시간에 감실을 응시하고 있으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만, 나 좀 봐라. 사람들 좀 그만 보고, 지난 일들 그만 보고, 이제 나 좀 보고 내 말 좀 들어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말씀과 교회 공동체, 그리고 감실을 응시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은 곳을 통해 들린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소주일에는 내 목소리가 아닌 주님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오늘 하루를 시작으로 해서 주님의 목소리를 좇아서 살아가는 첫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내용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그런 삶으로 바뀔 수 있는 소중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월 14일 부활 제5주일 : 요한 14,1-12.

글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가르멜수도회 한국관구장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오늘은 부활 제5주일입니다. 오늘 교회는 우리에게 요한복음 14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전해주고 계십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다양한 당부의 말씀을 담고 있는 13장부터 16장 사이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벌어질 당신의 운명을 예견하시면서, 성부의 뜻에 따라 기꺼이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3년간 당신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이 눈에 밟혀 많이 걱정하셨을 겁니다. 당신이 붙잡히게 되면 혹여 그들이 좌절하여 흩어지지나 않을지, 그동안 당신이 보여주고 가르치신 것들을 다 놓아버리지 않을지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함께 음식을 나누며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붙잡혀 떠나더라도 유감에 빠지지 말고 적어도 이것만은 명심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몸과 피를 의미하는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이시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사랑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을 위로하시며 절대 이것만은 잊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부여잡으며 하느님을 믿고 또 당신을 믿으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으니 안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는 부족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자무식의 어부에, 세리에, 열혈당원에,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정말이지 한참 떨어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느님의 집에는 그들 모두, 아니 우리 모두가 머물 곳이 다 마련되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분, 그분을 잊지 말라고 예수님은 당부하십니다. 게다가 주님은 당신이 먼저 아버지의 집으로 가게 되면 그들을, 아니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신 다음, 다시 와서 우리를 데려가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겠다는 위로와 희망 가득 찬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어디로 떠나는지 이미 가르쳐 주었으니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3년이나 따라 다니면서도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분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이 마지막 당부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진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다음의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신 천상본향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바로 당신이라고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 그분은 거기에 이르기 위한 길이자 동시에 목적이십니다. 진리 자체이시고 또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 역시 당신 안에 있다는 것을.

제자들을 떠나며 하신 오늘의 주님 말씀은 인생의 바다를 건너며 수많은 풍랑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우리들에게도 진정 위로와 희망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처럼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을 산란히 하지 말고 하느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어야겠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는 것과 예수님 친히 우리가 거할 곳을 마련하시고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임을 믿어야겠습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분을 뵙는 것이야말로 아버지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진정 그분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겠습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 당신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사람은 큰일을 하게 될 것이며 아버지께서 무엇이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5월 21일 부활 제6주일 : 요한 14,15-21.

글 김창현 베드로 신부 | 죽전성당 보좌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오래 전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보게 됩니다. 사이좋은 오누이가 부모님을 일찍 여읜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부모님이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에 동생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지요. 그러자 오빠는 동생을 별이 빛나는 언덕으로 데리고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부모님이 생각날 때마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면 돼. 저 별은 아빠별이고, 그 옆의 별은 엄마별이래. 언제나 하늘에서 우리를 보고 계시고 지켜 주시니까 너무 외로워하지마.” 이렇게 오빠는 부모님의 말씀을 동생에게 전해줍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고별의 말씀이면서도, 그들에게 힘을 주시기 위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누구이며, 무슨 관계였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오히려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서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이 생각납니다.

동화 속의 오누이는 반짝이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부모님을 떠올리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호자로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현존을 언제나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고 우리 안에 계시기까지 합니다. 진리란 누군가로부터 배워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닫고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라 하십니다. 성령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길이 없는 우리는 답답하고 걱정되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을 지키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우리의 밖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즉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고 있는지가 하나의 표지가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사랑의 새 계명을 살아가게 하는 그 힘이 바로 성령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뜻하신 바를 알게 하고, 이웃들과 나누는 사랑을 통해 예수님께서 행하신 바를 실천하게 하고, 고요한 침묵을 통해 예수님께서 간직하셨던 바를 묵상하게 하는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니까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때로는 누군가와 함께 있음이, 그 관계가 우리에게 가장 큰 힘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 관계를 더 돈독하고 따뜻하게 하는 것이 곧 사랑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의 작은 노력이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누구와 함께하고 있고, 어떤 사랑을 실천하고 계신지요?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예수님을 놓치지 않고 함께하고 계신지요?

 

 

 

5월 28일 주님 승천 대축일 : 마태 28,16-20.

글 반 유딧 수녀 |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대구가톨릭어버이성경학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부활하시어 40일 동안 우리와 함께 계셨던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시는 ‘승천’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승천은 ‘이별’같은 느낌이 들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선교사명을 부여하시며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확언하시는, 마치 한 장의 명화처럼 펼쳐지는 오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갈릴래아와 산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산에서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던 장소이며, 부활하신 후 재회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승천에 앞서 이방인의 갈릴래아로 불리던 이곳에서 세계 만민을 위한 복음선포의 사명을 다시 제자들에게 부여하십니다. 그것은 갈릴래아가 선교의 출발점이 되는 동시에 이방인의 선교를 의도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4,15) 그리고 ‘산’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께서 진복팔단을 선언하신 곳도 ‘산’이며(5,1-7,29), 거룩한 변모를 하시고(17,1), 기도하셨던 곳도 산이었습니다.(14,23) 이처럼 산은 계시가 내리는 장소, 곧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래아의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전하시는 사명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소명이기도 합니다.(18절) 내가 머무는 자리가 ‘새로운 갈릴래아’인 선교의 자리이며, 주님을 뵙고 그분의 사명을 받는 ‘산’은 기도의 시간임을 아시는지요?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산이 아니라 세상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입니다.

 

2) 열한 제자

복음서에서 처음으로 열두 제자가 아닌 ‘열한 제자’가 언급되고 있습니다.(16절)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생활했던 증인들로서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참조 사도 1,21-22)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는 주님의 기적과 말씀을 체험했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과 희망, 사랑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참조. 요한 13,2; 사도1,25) 신앙은 기적이나 경이로운 체험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참조. 요한 20,29)

 

오늘도 우리가 다 함께 신앙의 길을 가고 있지만 때때로 “의심하는 제자들처럼”(17ㄴ절) 하느님의 현존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보다 의심의 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작은 시련에 걸려 넘어지고, 시답지 않은 이론에 휘청거리며 이 세상에서의 안일이 더 급급한 나 자신 안에서 유다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저의 죄보다도 더 큰 당신의 사랑을 깨닫고 믿고 의탁하며 따르게 하소서.”

 

3) 선교의 사명

우리는 누군가에게 믿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가까운 사람은 가까울수록 더 어려운데 그들이 우리의 언행을 소상히 알고 있는 탓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는 나의 언행을 ‘담보’로 ‘썩는 밀알’이 될 때만이 싹을 내고 전해지는 아주 까탈스러운 씨앗입니다. 그러나 일단 전해지기만 한다면 30배, 60배, 100배로 퍼지고 자라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씨앗이기도 합니다.(참조. 마태 13,1-9; 13,31-33) 만약 내가 말씀을 전하고자 고심분투(苦心奮鬪)하는데도 열매가 없다면 나 자신의 언행을 살펴볼 일입니다. ‘나는 참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가? 혹시 나 자신을 전하는 영적교만에 빠져 있지는 않는가? 나의 신심생활은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따라가고 있는가? 아니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분열과 사적모임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인이란 상황과 때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밝혀가는 사람입니다. 가정, 직장, 교회 안에서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스스로 행하며 가르치고 지켜가는 생활로써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2코린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