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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1년을 지내며(8)
- 2015년 6월 23일부터 2016년 6월 23일까지


글 김형호 미카엘 신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목

헌옷에 실려 온 사랑: 10월 25일

아침 미사를 마친 후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뭔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귀를 기울였다. 자매님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는데 한화 1,000원짜리였고 이 나라 돈으로 얼마냐고 물었다. 500세파프랑 정도 된다고 했더니 바꾸어 줄 수 있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겠다고 했더니 남자(남편)를 바라보며 돈이 더 있다고 했다. 만 원 한 장, 오천 원 한 장, 천 원 석 장, 총 18,000원이었다. 어디에서 났느냐고 물으니 누군가가 헌옷을 나눠줬는데 그 옷 주머니에 있었다고 했다. 추측하건데 한국에서 헌옷들을 모아 이 나라에 구호품으로 보내왔고, 그 옷을 나눠 받은 사람이 주머니에서 행운의 돈을 발견했고 그 돈이 한화라는 것을 알고는 이 나라 돈으로 바꾸려고 내게 찾아온 것이다. 조금 후하게 10,000세파프랑을 주었더니(사실은 1,000세파프랑이 두 장뿐이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갔다. 문득 주머니에 돈이 있는지도 모르고 누군가가 잘 입기를 바라며 나누었을 그 한국인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넣었다기보다 깜박하고 보냈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옷 한 벌이라도 나누고자 한 그 마음 안에 실려 온 한화 18,000원이 오늘 한 가족을 참 기쁘게 하였다. 옷에 실려 온 이 돈(사랑)은 언젠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기쁘게 사용되기를 기다린다.

 

축복과 통공: 11월 1일

돌아서서 기도할 곳이 있고 앞을 보고 빌 것이 있음은 분명 행복이다. 축복을 청하는 것도 축복을 빌어주는 것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오늘 한 사람이 낡고 오래된 카메라를 들고 와서 축복을 청했다. 기도 도구도 아니고 새 카메라도 아닌데 별걸 다 청하는구나,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이유를 물어보니 교황님이 오실 때 사진 찍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잘 찍을 수 있게 축복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뿔싸! ‘별걸 다 청하는구나.’라는 생각의 교만이 부끄러웠다. 난 다만 축복을 청하는 이의 도구일 뿐 축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 얄팍한 사고로 판단한 어리석음은 과연 오늘만은 아니었을 테다.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과 ‘위령의 날’이 서로 붙어있음이 사뭇 궁금해지는 오늘, 삶과 죽음과 하느님 나라는 축복으로 서로 통함을 따로, 각각이 아닌 통공으로 하나임을 새삼 느끼는 하루였다.

 

채움: 11월 2일

가끔씩 나오는 다소 깨끗한 물을 몇몇 통에 가득 채우면 가진 충만함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하루 8시간, 그것도 여러 번 정전이 되지만 그 시간에 몇몇 충전기들이 완충되면 기분이 업(up)된다. 한 달에 한두 번 비누와 치약, 분말커피, 이런 것들을 비축해 놓으면 멀리서, 가끔 가까이서 들리는 총소리도 그저 지나는 소리가 된다. 문득 ‘탄창에 총알을 채우며 장전하면 기분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군에서 사격훈련하며 모형(적으로 규정된 사람 모형)을 여러 번 쏴 본 기억은 있지만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누군가를 쏘기 위해 탄창을 장전하는 마음가짐은 어떨까? 누군가에게 보복하기 위해 총알을 장전하는 이들과 그들이 일으키는 소요를 안 정시키기 위해 탄창을 끼우는 다른 이들 속에서, 난 그저 즐기는 오늘과 내일을 사는 장전(채움)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같은 총알이고 장전인 셈이다. 다들 잘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각자 나름의 장전을 하며 사는 것이다. 내가 만나는 이들의 대부분은 그저 하루 한 번 배부름으로 마냥 기뻐하며 춤추는 이들이다. 이렇게 순박한 이들 중 몇몇이 왜 총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1등을 위한 몸부림도 아닌, 더 오르기 위한 치열한 자기개발이 필요 없는, 무한경쟁 속에 망각해버린 ‘사는 이유’를 그저 즐김으로 만족하는 이들의 관조를 통해 배운다. 그래도 행복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기며 춤추는 이들의 거저 살이를…. 어쩌면 다만 지나는 것들 안에 ‘몸을 맡기는 지혜’를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즐기며 채움을 생각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간간이 들리는 총소리가 그리 문제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충만한 평화가 이들의 삶을 더 살갑게 보듬어 주기를 기도한다.

 

상고어 강론: 11월 12일

한국어로 먼저 쓴 후 배운 외국어로 강론을 옮기는 일을 포기했다. 1년여 프랑스어 공부를 통해 터득한 뼈저린 경험이기도 하다. 그저 어린 아이 수준으로 아는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을 반복하고 성경말씀을 엮어서 몇 줄 겨우 쓰는 것에 기뻐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주임신부님으로부터 한 주에 두 번(목·금) 미사주례와 강론을 해달라는 청원에 가까운 명령을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순명했지만 밥값을 하려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밥값이 이렇게 많은 진땀을 흘리게 할 줄이야. 앞서 조금 배운 프랑스어도 아닌 새로 시작한 상고어(현지어)로 강론을 준비하기는 사실 만만찮은 일이었다. 현지인 언어 선생님으로부터 그동안 배운 상고어를 몇 자 적고 단어를 모르거나 표현이 안 되는 상고어는 불어로 사전을 찾고 애 를 써서 유아 수준의 문장을 만든다. 다행히 먼저 오신 그레고리오 신부님이 상고어 성경과 상고어-한국어 문법과 성경에서 뽑은 표현들을 정리해주신 것이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감사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것은 모르거나 맴도는 단어를 찾으려 해도 사전이 없다. 나름의 요령은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을 반복하고 성경을 인용하는 것인데, 그나마 프랑스에서 체득한 인고의 시간과 그 지혜가 도움이 된다. 아이의 언어로라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할 수 있음에 기뻐하기!

다행히 횟수가 거듭될수록 초안으로 적혀지는 것들 중에 불어가 줄어들고 상고어가 조금씩 늘어간다. 이렇게 완성된 초벌도 언어 선생님의 교정을 받으면 붉은 줄과 덧씌워지는 글로 한차례 홍역을 치른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탈고되는 상고어 강론은 그 어설픔에도 불구하고 날이 차면 복음으로 선포된다. 분명 열매도 아니고 뜸들이지도 않은 정체불명의 씨앗일 뿐이다. 어쩌면 듣고 앉아있는 이들에게는 언어폭력일지도 모른다. 물론 복음 말씀과 성체성사의 은혜로 이 또한 어루만져지겠지만…. 원복음이신 예수님께 죄송하고 감사드릴 뿐이다.

미사를 마치고 인사치레로 고맙다고 전하는 이들을 만나 면 잠시 기쁘기도 하지만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들은 여전히 잘 못 알아듣고 대화를 오래 이어가지도 못한다. 외국인으로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듯, 선교사로 산다는 것 또한 참으로 힘들고 먼 여정인 듯하다. 산 넘어 산이겠지만 욕심을 버리고 그저 할 수 있는 것에 감사드리고 하루하루의 삶을 다만 기쁘게 살 수밖에 없는 일이다. 힘들지만 아직 어설픈 발음으로 드리는 미사와 유치의 극치일 것 같은 아둔한 강론을 들어주는 이가 있어 그래도 기쁘다. 그들에게는 작은 희생이겠지만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로 살게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살며 꿈꾸며: 11월 18일

본격적인 선교사의 삶을 살 곳을 다녀왔다. 방기에서 10시 30분 방향으로 125km 떨어져 있는데, 나보다 3년 먼저 오신 선배 신부님이 본당신부로 발령받았다. 현지 신부 한 명이 한시적으로 보좌신부로 함께 산다. 나와 후배 신부님 한 명은 내년에 합류할 예정이다.

200호 정도의 집이 있는 본당과 30호에서 150호 정도의 집이 있는 공소(작은 공동체)가 예닐곱 개 있다. 특히 작은 숲길로 50km(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소는 머리로 그려본 전형적인 아프리카의 모습이었다. 억새 같은 풀로 엮은 지붕과 자연스레 굽은 나무 기둥과 흙벽돌로 지은 교실 하나 크기의 성전, 드문드문 놓여 진 몇 개의 나무의자는 세월의 무게에 기울어져 있고, 제단 위에는 언제인지도 모를, 새로 지붕을 엮으려 갖다놓은 풀더미가 제물의 정결함으로 가지런히 있고 머리가 닿을 듯한 천장 곳곳에 거미들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지붕으로 엮은 풀들의 작은 틈과 양쪽으로 뚫린 문, 흙벽 사이에 난 작은 구멍 사이로 들어온 빛이 초라하기 그지없는 움막 성전을 거대하고 화려한 유럽의 어느 성전보다 더 포근하게, 마치 모태의 아늑함으로 기도하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한 지 10여 분이 지나니 공소회장, 선교사(교리교사)와 서너 명의 교우가 모였다. 200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젊은 엄마를 따라온 한 아이의 올망졸망한 눈망울이 앞으로의 신명난 삶을 예견하고 있었다.

본당은 길에서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아담하게 지어진 교실 1개 반 정도의 흙벽돌로 지은 성전이다. 주일미사를 봉헌했는데 150여 명의 교우들이 모였다. 70% 정도가 어린이와 학생이었고 어른은 30% 정도였다. 미사 내내 새로운 신부를 맞이하는 즐거움으로 함박웃음이 가득했고, 노래와 춤은 땀땀(북)과 어우러져 야트막한 숲을 가로 질러 맑은 하늘로 신명나게 울려 퍼졌다. 미사 후 간단한 인사를 하고 교우들이 준비해준 소박한 음식을 먹었다. 주변에 큰 저수지가 있는데 그곳에서 갓 잡아서 만든 붕어찜(?) 같은 요리였는데 부드럽고 담백했다. 가끔 악어도 잡히는데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지나는 길에 복지시설을 지을 곳도 살펴보았다.

연말과 내년 1월 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1차-2차)가 끝나고 정세가 안정되면 본당과 공소, 복지시설 등을 짓고 정비하여 이곳 사람들과 함께 오순도순 살아갈 예정이다. 먼저 오신 선배 신부님이 내년 초 본격적으로 시작하실 것이고 추후 나와 후배 신부님도 합류해 함께 살아갈 예정이다. 그 삶을 생각하니 신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데 분명한 건 무척 설렌다. 그래서 오늘도 난 이 나라말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아직은 책상과 의자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