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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현장에서
아픔으로 다가감과 함께 아파하기(Compassion)


글 도건창 세례자요한 | 카리타스복지교육센터 소장

어느 성금요일 오후, 교구청 사목국에서 전화가 왔다. 교구청으로 항의방문을 오신 분이 있는데 사회복지와 관련된 일인 것 같으니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교구청 별관 사목국 사무실로 가니 연세가 지긋한 여자 분이 두꺼운 골판지에 흰색 도화지를 붙인 플래카드를 몸 앞뒤로 걸치고 계셨다. 그 여자 분이 걸치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아들이 우리 교구에서 운영하는 곳이 아닌 장애인보호작업장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은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로서는 문제해결은 고사하고, 실제 사실도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생각해보려고 우리 사무실로 그분을 모시고 왔다. 5시간 남짓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들의 억울함에 관한 어머니의 소박하지만 강렬한 분노와 당신의 요구가 우리 사회에서 거듭 거절되면서 겪었을 속상함과 억울함이 마음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7~8년이 지난 일이고 관계 기관들로부터 이미 답변을 받았기에 그분의 바람대로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런 만큼 무기력한 나 자신을 향한 실망만 커져갔다. 

퇴근도 하지 못하고 이야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무실 동료들을 보니 마음도 점점 초조해졌다. 그래서 그분께 말씀드렸다. “사회복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머니께서 속상해 하시는 것을 함께 느끼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드리기 힘들겠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있는 힘껏 돕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다시 탄원서를 써야 하는데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내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탄원서 적는 것을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예, 잘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머니 마음을 담아 써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분도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볼 여유가 생겼고 그제서야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오늘 제사 준비해야 하는 날인데 가게들이 문을 닫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네!” 하며 서둘러 시장을 보러 가셨다. 그분을 그렇게 애타게 하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분은 자신을 무겁게 억누르던 지나간 아픔의 굴레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현재 당면한 일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며칠 후 나름대로 성심껏 정리한 탄원서를 그분께 전해드린 뒤로는 교구청에서 그분을 뵌 적이 없다. 한참 후 거리를 지나가다 길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시는 그분을 먼 발치에 서 한 번 뵈었다. 그날 저녁 끼니를 거른 배고픔을 달래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수님께 투덜거렸다. “배고픈 것을 지독하게도 못 참는 제게 하필 성금요일 오후에 그분을 보내셔야 했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나는 그 질문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대답을 듣고 있었다. 교회에서 사회복지 일을 시작한 이후에 아파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나에게 맡겨진 과업이 아니거나 권한 밖의 일이기 때문에 또는 내가 해결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지나쳐버린 숱한 사람들, 그래서 함께 아파하는 것조차 외면했던 사람들이 기억났다. 돌이켜보면 이리저리 재지 않고 그냥 다른 사람의 아픔에 다가가고 함께 아파했을 때에 더 열심히 일하고 싶었고 더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준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다르지 않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분의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1984)에서 이 비유가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 각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지적”해주는 “고통의 복음” 이라고 했다. 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그 곁에 멈추어 서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민감한’ 모든 사람”, “고통 속에서 도움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는 “고통 중의 인간에 대한 자비심의 증거가 되는 이 마음의 민감성”을 길러서 실질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자극제”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이상 28항)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여전히 내게 두려운 일이고 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일은 나에게도 무거운 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누군가가 함께 아파하며 필요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이 자신이 겪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고, 그것을 통해 나 역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서로 나눌 때 내가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고통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고통이 더 “인간다운 사랑의 세계”(29항)를 요구하는 부르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