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 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 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 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 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 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 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 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7월 2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 마태 10,17-22.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해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을 뒤따르던 사람들 안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 한반도에서도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 갈라지고, 가족들도 갈라지는 일들이 예수님 을 따르던 이들에게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도 서로 첨예하게 긴장관계가 발생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인들이 서로 갈라지는 것이 모두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이 경우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신앙인들끼리 신앙 때문이 아니라 이해관계나 감정 때문에 갈라지는 경우도 생겨납니다. 어쨌든 예수님을 충실히 믿다보면 아주 가까이 있던 사람들끼리 갈라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다 보면 사람들 안에 아주 심각한 긴장관계가 생깁니다. 신앙 때문에 일어나는 긴장

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정말 무엇인지를 찾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갈등은 있을수록 좋은 일입니다. 올바르고 정의로운 일을 위해 생기는 일도 클수록 좋은 일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위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들입니다. 우리 사이에 생기는 긴장관계를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사이의 갈등을 겁내지 말아야겠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이 큰 축일을 맞이해서 오늘 복음은 박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칠 고난과 박해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를 주님께서는 알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 구절인 16절에서는 슬기롭고 양순하게 처신하여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괜한 일로 미움을 받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슬기롭고 양순하게 처신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18~20절에서는 “자신의 잔재주를 믿고 그 고난을 해결하려 하지 말라. 주님의 힘에 의지하라. 성령께서 도우심을 믿고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의 바로 다음 구절인 23절에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고 하십니다. 괜히 피할 수도 있는데 오기를 부리면서 힘들게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박해는 없습니다. 굳이 비유를 하면 주님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없도록 유혹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박해일 것입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그 앞에서 불평하고 속 썩이는 것보다 그냥 피하는 것입니다. 눈 딱 감고 피하고 자신이 할 것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남 욕할 것도, 상황 탓할 것도 없습니다. 주변상황이나 사람들이 자신의 과업과 영적성장에 방해가 된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그 상황과 사람들이 내 삶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이라면 간단하게 피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을 기억하는 우리들 모두 다짐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긋하게 자신의 열정을 품고 끝까지 변함없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다고, 너무 어렵다고 자신의 소명을 게을리 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끝까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냈으면 좋겠습니다. 외롭다고 다른 데 기웃거리지 않고, 힘들다고 다른 것으로 자신의 아픔을 달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의 마지막까지 열정을 품었던,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진리를 팔지 않았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처럼 ‘처음의 열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신앙인’, ‘하늘 향해 끝까지 바르고 꼿꼿한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월 9일 연중 제14주일 : 마태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글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가르멜수도회 한국관구장

오늘은 연중 제14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이 이야기가 담겨 있는 마태복음 11장에는 유다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계신 예수님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병든 이가 치유되고 죄인이 용서받는 등 구약에 언급 된 메시아 도래의 징표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하시며, 당신에 앞서 와 회개의 복음을 선포한 세례자 요한의 말도 듣지 않았다고 질책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당신이 복음을 선포하고 가장 많이 기적을 일으켰지만 회개하지 않았던 대표적인 고을들을 향해 크게 야단을 치십니다. 차라리 티로와 시돈 같은 곳에서 그 일을 하셨더라면 이미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라 한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이런 배경을 두고, 어떤 이들이 진정 축복 받은 이들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소위 스스로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메시지를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들에게 그것을 드러내 보이셨다고! 회개하지 못한 이들은 자신들의 인간적 지식에, 얄팍한 자신의 논리 안에 갇혀서 새로운 길로 초대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자신의 논리만이 옳다고 보기에 그 논리에서 벗어난 주님의 말씀이 오히려 잘못됐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메타노이아’와 ‘에페스트로페’로 표현됩니다. ‘메타노이아’는 마음의 변화를, ‘에페스트로페’는 행동의 변화를 일컫습니다. 회개를 이루기 위한 첫 걸음은 무엇보다 ‘자아인식’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회개는 결국 자신에게서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이 잘못됐음을 깨달을 때 새로운 길을 향해 걷겠다는 마음도 생깁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특히 진심으로 하느님을 향해 길을 걸으며 신앙생활의 진보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 ‘자아인식’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완덕에 이를 때까지 늘 동반되어야 하는 영적 자양분입니다. 이 작업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가진 것이 많건 적건, 공부를 많이 했건 적게 했건, 사회적으로 출세를 했건 아니건 상관없이 자신의 현주소, 자기 실존의 자리가 어디인지 파악하는 것, 주님을 향한 인생의 여정에서 자신은 어디쯤 와 있는지 제대로 아는 것은 남은 인생을 참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한 지혜의 시작입니다. 자아인식에 있어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영원무궁한 참된 진리이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허무함,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생명마저도 내게 그 권리가 없고 주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분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인은 진정 마음이 가난합니다. 아무 것도 자신의 것으로 두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며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그는 더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상의 지혜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느님께서 창세기 3장 9절에서 아담에게 하신 “너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을 되새겨보며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을 되돌아보기로 합시다.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 : 마태 13,1-23 또는 13,1-9.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18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 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글 김창현 베드로 신부 | 죽전성당 보좌

“당신의 언어 온도는 몇 도쯤 될까요?” 『언어의 온도』라는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묻습니다. 언어에는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가 저마다 다르고,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합니다. 뜨거운 언어에는 감정이 잔뜩 실리기 마련이라 듣는 사람이 정서적 화상을 입을 수 있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현은 상대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한다지요. 하지만 적당한 온기의 언어는 사람을 감싸 안고 품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느냐는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렸습니다. 길가, 돌밭, 가시덤 불, 좋은 땅이라는 네 가지 상황은 우리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말씀의 씨앗은 예외 없이 모든 이에게 뿌려지지만, 그 말씀의 온도는 물론 그것을 받아들이는 토양인 우리의 마음도 중요합니다. 언어는 마음을 통해 더 확고히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때로는 뜨거운 온도로 우리 자신을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차가운 온도로 스스로를 냉철하게 살펴보고 되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함, 얕은 믿음, 세상의 시련과 유혹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담긴 사랑의 온기입니다. 복음에 담긴 예수님의 언어는 몇 도쯤 될까요? 우리를 애틋하게 여기시고, 연민과 위로의 눈길로 건네시는 말씀에는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체온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언어는 달변가의 언어도 아니었고, 학식이 높은 지식인의 언어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완성된, 그 모든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권위 있고 알아듣기 쉬운 말이란 오랜 경청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아예 들으려 하지 않으므로 망설임도 울림도 없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쉽게 생각한 나머지 뿌리가 깊지 않습니다. 한 귀로 흘리는 것과 같지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내가 처한 상황과는 별개로 단정 지어서 무성하게 싹을 틔우지만 금방 숨이 막힙니다. 즉 의미를 찾지 못해 한계에 부딪히지요.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내의 시간을 지나 열매를 내놓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말씀과 말씀을 듣는 것, 즉 소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어떤 온도로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는지, 또 어떤 온도로 누군가의 말을 들으려 하고 있는지요? 그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와도 구체적으로 연결됩니다. 소통은 복음의 징표입니다.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소통 안에 성찰과 변화가 있으며, 실천과 쇄신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통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몇 배의 열매를 맺기 마련입니다.

 

 

 

 

7월 23일 연중 제16주일 : 마태 13,24-43 또는 13,24-30.

24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31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32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33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34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35 예언자를 통하여 “나는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리라. 세상 창조 때부터 숨겨진 것을 드러내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6 그 뒤에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 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글 반 유딧 수녀 |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경산 베네딕도성경학교

“하늘나라는 …와 같다.”(마태 13,24)

우리의 어린 시절, 하늘나라는 ‘꽃들이 만발하고, 보석으로 지은 집들과 산해진미의 음식이 넘치고, 슬픔, 고통도 없는 곳’이라고 들어 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들어 수긍할 수 있는 ‘하늘나라’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13장은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로 채워져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겨자씨” 그리고 “누룩”과 같다고 합니다. 이는 하늘나라의 현상(現狀)이나 상태(常態)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특성(特性)에 대해 알려줍니다. 우리가 만나게 될 하늘나라의 현상보다 ‘하늘나라’ 자체가 의미하는 것이 더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접고 예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곧 “주인”입니다.(24절) 그러니까 하늘나라는 주인이 ‘밭’을 돌보고, 가꾸며, 당신의 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계시는 장소입니다.(30절) 그래서 밭은 온전히 주인의 의향에 따라 관리됩니다.(지혜 12,16 참조) 그곳에 주인이 뿌린 좋은 씨와 원수가 와서 뿌린 나쁜 씨가(27절) 함께 자라고 있다 해도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30절)고 하시는 주인의 기다림과 자비가 넘치는 장소입니다. 비록 좋은 씨와 나쁜 씨가 공존한다 해도 주인이 계시기에 종들은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절) 하고 소리치거나 서두르며 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외치지 않아도 됩니다. 하늘나라의 정의(正義)는 사람이 기준 하는 선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안배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창세 3,5; 지혜 12,18 참조) 주인은 가라지를 제거하려다 밀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자비와 섭리의 보호자이십니다. 또한 그곳은 주인의 보호 속에서 가라지조차 이삭을 맺어가는 ‘터전’으로서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며,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며” 함께 뛰노는 장소입니다.(이사 11,6)

그러나 좋은 씨와 나쁜 씨가 ‘같은 밭’에서 함께 자라고 있다고 해서 수확의 그 날에도 같이 추수되어 같은 장소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30절; 지혜 12,17) 그곳은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예수님께서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풍요와 만족으로 채워져 우리의 육신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하늘나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늘나라는 ‘작은 씨가 큰 나무가 되듯이, 작은 것이 크게 채워져 아쉬움이 없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 말 밀가루 속에 든 누룩이 온통 부풀어 올라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는 큰 잔치가 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의 나라’입니다.(마태 13, 31-34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의 일원입니다. 언제 어디에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8,20) 하늘나라를 받아들여 내 안에서 확장해 가야 하는 것만이 ‘나의 몫’일 따름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며, 성녀 대 데레사의 시를 기도로 드려봅니다.

“님이여! 그대 고이는 내 마음이 천당을 바라서가 아니오이다. 지옥이 무서워도 아니오이다. 내 님이 그대시기에 내 마음이 쏠릴 따름, 십자가 못 박히신 그대 뵙노라면 그 수모, 그 죽음에 마음 메어지오니 결국 나를 당기는 건 오직 님의 사랑, 천당이 없더라도 그대 고이오리다. 지옥이 없더라도 그대 두리오리다.”

 

 

 

 

7월 30일 연중 제17주일 : 마태 13,44-52 또는 13,44-46.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46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47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49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50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51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5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안에는 하늘나라에 대한 아주 짧은 비유 두 개가 담겨 있습니다. 이 복음을 들으면 먼저 하늘나라가 이렇게도 짧은 이야기로 표현 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하늘나라가 이렇게 간단하고 단순한 이야기 안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놀랍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실력은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짧은 두 개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거의 같은 구도로 전개되는 두 개의 이야기는 단순히 말로만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늘나라에 대한 이 짧은 두 개의 이야기를 잘 들어보고 묵상해보면 신기하게도 살아 움직이고 힘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짧은 이야기가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고 힘이 막 솟아 나올 수 있는지, 굉장히 놀라운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같이 한번 느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이 두 이야기는 서로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서로 같은 점을 찾아봅시다.

첫째, 하늘나라는 보물, 진주라는 아주 값지고 고귀한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사람들에게 대단히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들 눈에 금방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거나 찾아야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둘째, 감추어져 있는 하늘나라는 계속 묻혀 있지 않고 사람에게 발견됩니다. 하늘나라는 밭이라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발견됩니다. 하늘나라가 사람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셋째, 하늘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그 자리에 두고 돌아갑니다. 원래 살고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다 팔아 그것을 삽니다. 그런데 그 액수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을 다 팔아야만 차지할 수 있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얼마를 가졌든지 상관없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바쳐야만 차지 할 수 있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이렇게 하늘나라에 대한 두 개의 이야기는 “발견-돌아감-자신의 것을 다 처분함-돌아옴-사들임”이라는 움직임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 안에 있는 움직임은 우리도 움직이게 합니다. 먼저 우리 주변에 그 귀한 하늘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움직임입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늘나라를 찾게 만드는 것이 이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첫 번째의 힘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늘나라를 발견하게 되면 이 이야기에 나오는 움직임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우리 곁에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계속 쏟아 부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만큼 귀한 것이고 그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 귀한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고 그것을 사들이는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정말 귀한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하늘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래서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