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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바람이 분다. 풀이 눕는다···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실장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낮에는 아직 햇살이 따갑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붑니다. 전 어릴 때부터 바람 부는 걸 무척 좋아했습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풀이 물결치는 소리가 듣기 좋습니다. 몇 년 전 바람 많은 제주도에 갔을 때, 세찬 바닷가 바람에 보리밭의 청보리가 눕는 소리가 너무 좋아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보면서 논어에 나오는 옛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강자가 어느 날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유하자면,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백성의 덕은 풀입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습니다.”1)

 

바람은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고 백성들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풀이라고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민초(民草)’라고도 했지요. 풀은 바람에 따라 흔들리기 마련이므로 바람이 어떻게 부느냐가 중요하듯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위정자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고 백성들을 위한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굳이 위정자들에게 국한된 말씀은 아니겠지요. 한 가정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그러하고, 공동체의 장상과 회원들의 관계가 그러하며, 성당의 사목자와 신자들의 관계가 그러할 것입니다.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 20,25~26)

그런데 오늘날은 백성들이 마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은 시대입니다.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이 잘못하면 백성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목소리를 높입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권력자들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부패하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민주적인 절차를 요구하며 권력자들에게 그 책임을 묻습니다. 가정이나 성당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를 사랑으로 돌보고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히 하지 않는다면 구성원들이 반발하며 따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시대가 변했지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며 반발합니다. 그래서 세대 간의 갈등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의 시 “풀” 부분)

 

시인 김수영은 바람에 흔들리는 약한 풀을 이야기하면서, 힘없고 약한 풀이지만 결국 주체적으로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끈질긴 저항을 노래합니다.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풀을 눕힐 수도 있고, 풀이 바람에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바람과 풀이 서로 춤을 추듯이 나부끼는 모습일 것입니다. 바람은 풀을 해치려고 하지 않고 풀도 산뜻한 바람에 몸을 맡기며 함께 어우러진다면, 그야말로 아름다운 가을 들녘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