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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현장에서
부탁하기
- 당사자를 주인공으로


글 도건창 세례자요한 | 카리타스복지교육센터 소장

 

한 사람의 어려움은 그 사람이 주인공으로 문제해결에 참여할 때 가장 잘 극복할 수 있다. 23년 전 사회복지 일을 시작하며 체험으로 배운 교훈임에도 자주 잊고 일한다.

 

“요한네스, 복도로 나오지 말아요! 00 여사님이 또 옷을 벗고 나오셨어요.”라고 하는 선임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급히 직원 사무실 겸 휴게실로 뛰어 들어갔다. 60대 중반의 여성인 그분은 노인간호조무사 실습을 하던 빈(Wien) 000요양원 3층에서 가장 연세가 적은 주민 가운데 한 분이었다. 독신인 이분은 갑자기 치매증세가 심해져서 요양원으로 오셨다. 평소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고 유머도 많지만 한 주일에 두세 차례 옷을 안 입으려 하고 침실이나 휴게실을 떠나 어딘가로 가려 하셨다. “그분은 그 행동을 원해서 하시는 것일까? 병 때문에 당신 의지와 관계없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 그 행동 뒤에 숨겨져 있는 그분의 바람은 무엇일까? 또 당신이 바라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드릴 방안은 무엇일까?” 우리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방안을 찾기 위해 여러 관계자들이 함께 회의를 했다. 그분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옷 입기를 거부하는지 또 어디를 가고 싶어 하는지 꼼꼼하게 여쭈어 보고 살펴보았다. 옷 스타일이나 옷 입는 것을 도와주는 방식을 바꾸어 보고,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매일 산책시간도 가졌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을 회의에 초대해 함께 의논했다. 회의 중에 그분이 18세 때부터 요양원에 오기 몇 년 전까지 비서로 일하던 이야기를 하실 때 유난히 표정도 밝고 두 눈이 반짝였다. 전화를 받는 것에서 일정 관리까지 세세하게 설명하면서 당신이 얼마나 그 일을 잘했는지 자랑하셨다. 그분은 자신이 왜 옷 입기를 거부하고, 무엇을 위해 밖으로 나가려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하셨다. 그럼에도 회의를 마치고 여러 동료들은 그분께는 스스로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고 의견을 모았다.

 

마침 오스트리아에 장기요양보험 도입을 앞두고 있어서 업무와 관련해 작성해야 할 서류가 갑자기 늘어났고, 우리 팀에는 나를 비롯해 외국인이 4명이나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분께 직원들이 일상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문서를 교정하고 타이핑하는 일을 도와주실 수 있는지 여쭈면서 부탁을 드렸다. 승낙을 받고 그분과 함께 중앙복도에서 직원 사무실로 가는 좁은 복도에 작은 의자가 딸린 책상과 구형 타자기, 사무용품을 담는 서랍을 갖춘 미니 사무실도 꾸몄다. 그분께서 일을 시작하고 깜짝 놀랄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더 이상 그분께 옷을 입으시도록 설득하거나 도와 드릴 필요가 없었다. 원하시는 옷을 둔 장소를 잊으셨을 때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 드리면 되었다. 그분은 우리 외국인 직원들에게 깐깐하면서도 꼼꼼한 선생님이 되셨다. 몇 달 후 독일로 떠났기에, 00 여사께서 얼마 동안이나 그렇게 일하셨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분은 000요양원 3층에서 당신이 다시금 일의 주인공이 되셨고, 그것을 통해 일방적으로 돕는 일을 넘어 서로 나누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 체험에서 배운 것은, 해답은 당사자에게 있고 귀여겨듣고 잘 관찰한 다음에 준비된 부탁을 하는 것이 우리 일의 열쇠라는 것이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치유해 준 한센병 환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태 8,4)고 부탁하신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치유는 예수님께서 도와주셨지만 한센병으로 인한 낙인과 사회생활 배제를 풀기 위해 할 일은 당사자에게 맡기셨다. 그를 치유의 공동 주인공이 되도록 하신 것이다. 나아가서 예수님은 홀로 일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당신과 함께 지내고 복음을 선포하며, 마귀를 쫓아낼 제자, 곧 동지를 불러 모으셨다.(마르 3,14-15 참조)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과 돕는 사람이 돕는 일의 공동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은 카리타스, 가톨릭교회 사랑실천을 위해 중요한 기본생각 가운데 하나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라고 믿기 때문(마태 25,40)이고 이웃을 돕는 사람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던 일을 본받아 계속하는 사람(마태 10,7-8 참조)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도움을 청하는 이웃에게서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보면서 일하고 있는가?(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10항) 나는 동료와 가치, 가치를 구현하는 방법,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합의한 목표를 함께 지향하는 파트너로서 함께 계획하고, 목표를 향해 같이 걷고 있는가?(『국제 카리타스 회원기구를 위한 윤리강령』 중 파트너십 원칙 참조) 오늘 회의나 대화는 그 정신에 따라 진행되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