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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와 킨포크(Kinfolk)


글 한승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누군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8월의 크리스마스’라고 대답한다. 지난 4월호에서 이 작품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1998년 당시 신인감독이었던 허진호는 톱스타 한석규, 심은하를 캐스팅하며 많은 화제를 낳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존의 이야기와는 많이 달랐다. 대부분의 영화는 평범하지 않거나 혹은 평범하더라도 주인공이 일상에서 경험하기 힘든 사건을 통해 이야기를 펼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그저 주인공의 일상을 담담하게 다루고 있다. 프로덕션 디자인(Production Design;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여러 가지 미술적인 요소들을 만들어내는 작업) 또한 인위적이지 않다. 우리가 현재 일상에서 경험하는 장소를 그대로 살렸다. 주인공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주인공(한석규)이 심각한 병에 걸렸지만 그 병명을 드러내거나 드라마틱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여주인공(심은하)과의 관계 또한 로맨틱하거나 자극적이지 않다. 연기(Acting) 또한 일상을 그대로 담아냈다. 한국 연기의 전환점을 이룬 배우가 한석규이다. 이전의 한국 배우들의 연기는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과는 다른 과장된 무대연기(Stage acting) 스타일이었다. 예를 들면 신성일, 엄앵란 스타일의 연기였다. 그러나 배우 한석규는 과감히 거품을 제거하고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연기를 시작했고 이제는 그것이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그의 일상의 연기는 특히 일상을 그대로 담아낸 이 영화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바로 ‘일상의 의미’다. 영화가 일상을 벗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해 일상을 벗어난 경험을 주는 이유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한 것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그리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일깨워준다.

 

미국 서부 포틀랜드에서 2011년에 계간지로 시작한 잡지 킨포크(Kinfolk; 넓은 의미의 ‘가족’이라는 뜻)는 자연친화적이면서도 아날로그적 삶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 젊은층을 중심으로 킨포크 라이프 스타일이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아 영상, 음악, 패션까지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킨포크 창업자 겸 편집자인 네이선 윌리엄스(Nathan Williams, 31세)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조선일보 7월 21일자)에서 “따뜻한 밥 한 끼를 연결고리로 해서 사람과 대화에 가치를 두고 책을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박함을 가장한 과시’라는 비판에는 “원래 킨포크의 목적은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행복한 순간을 나누는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인데 억지로 꾸민 듯한(contrived) 사진을 올리며 허울(facade)에만 빠진 이들이 있다. 그런 식으로 위장해서 거짓된 모습을 보여주는 건 위험한 일이다.”라며 경계했다. 사실 킨포크 스타일이라고 해서 팔리는 옷들의 가격이 소박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처럼 ‘소박함을 위한 과시’라는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TV 프로그램에서도 발견된다. 효리네 민박, 삼시세끼, 이집 사람들 등 킨포크 스타일의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인기 연예인들과 일반인들이 평범하게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러나 출연하는 연예인들도, 일반인들도 평범한 삶과는 동떨어져 있다. 출연하는 한 연예인은 몇 년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생활했느냐는 질문에 ‘나 ○○○에요.’라며 당당하게 자신의 재력을 과시한다. 출연하는 일반인들 또한 직장의 삶을 거부하고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을 가진 돈을 다 털어 세계여행을 하고 돌아와 나만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프로그램은 그들이 평범한 직장생활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의 스타일을 살아가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며 놀라움과 찬사를 보낸다.

 

다양한 삶의 형태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은 성숙한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제도화된 사회 안에서 각자의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제도권에 순응하는 용기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비춰질까 두렵다. 새벽밥을 먹고 혹은 먹지도 못하고 직장에 일찍 출근해서 야근하는 날도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마치 자신은 잘못된 삶을 사는 사람들인 것처럼,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무섭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이끌어 왔던, 지금 이끌고 있는, 그리고 이끌고 나갈 원동력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말라. 풍요를 불러낼 만한 힘이 없는 너 자신을 탓하라.”고 했다. 평범한 일상이 예사롭지 않은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고 살 때 우리의 일상은 의미를 잃는다. 카페라테 한 잔을 킨포크 스타일로 찍어 SNS에 올려 자신을 꾸미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기 보다는 잠들기 전 하루를 되돌아보며 일상 안에 존재하시는 그분을 발견하는 진정한 하느님의 킨포크(Kinfolk; 가족)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