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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체벌


글 박경현 프란치스코 | 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마치 통나무를 세워 놓은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두려움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던 친구들도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지만 이미 수업을 알리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저 멀리 복도의 끝에서 발자국 소리와 함께 기다란 막대기 끌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린다. 교실의 앞문이 열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들어선 선생님의 옆구리에 기말고사의 답안지와 야무진 매가 들려있다. 예고된 일이지만 아이들의 탄식 소리가 아주 낮고 짧게 새어나온다. 선생님의 얼굴에 가볍게 흐르는 미소가 소름끼친다. 천천히 출석을 확인하고는 맨 앞자리에 앉은 아이를 뒤로 보내고 책상을 멀찍이 밀치며 막대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반원을 그리며 넉넉한 공간을 확보한다. 마치 엄숙한 의식이라도 하듯이 의자 하나를 교단 위 칠판 앞에 반대 방향으로 놓는다. 그리고 건조한 음성으로 대상자의 이름을 부른 다음 죄목과 형량을 귀찮다는 듯이 내뱉는다. 무장 해제된 아이들은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자신의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의자에 올라서서 호흡을 멈추고 코앞의 운명에 몸을 맡긴다. 긴 막대가 바람을 가르며 소리를 낸다. 회초리가 한 번씩 파열음을 낼 때마다 종아리에는 가로로 피멍의 자국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비명을 지르면 불이익이 있기 때문에 새어나오는 신음을 가두기 위해 어금니가 일그러지도록 깨물고 양 볼과 두 눈이 튀어 나올 듯 부푼다.

적막한 교실에는 막대기와 아이들의 연한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퍼진다. 공포는 닥쳤을 때보다 상상하며 기다릴 때 더 강하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나의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다. 온 몸이 후덜덜 떨리고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무슨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나서 눈앞의 장면이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자에 올라서서 칠판에 두 손을 짚고 홀로 서 있는 그 짧은 시간의 외로움과 공포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 회초리가 주는 고통보다 많은 친구들 앞에 벌 받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열등감 등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뒤범벅이 된다.

하지만 ‘떨어진 석차만큼’이라는 이 기준으로 인해 1년에 네 번의 관문을 아무런 사고 없이 지나가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 조금의 위안이 된다. 모두 당하는 일을 나만 못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몸을 맡긴다. 머릿속에 모든 생각을 지워버리고 감정과 감각도 지워버리고 곧 지나갈 짧은 시간을 버텼다. 하지만 의자에서 내려서는 순간 갑자기 온 몸에 힘이 빠지고 견디기 힘든 통증이 전해온다. 몸을 비틀고 종아리를 급하게 문지르며 엉금엉금 자리에 돌아오면 눈물이 쏟아진다. 그러나 이렇게 한 시간여 매의 향연이 끝나고 나면 아이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기의 종아리를 내어 보이며 무용담을 풀어 놓는다. 그것이 전부이다. 종아리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 시험이 다가올 때까지는 까맣게 잊고 산다. 큰 키에 야윈 몸매를 가진 이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이 혹독한 통과의례가 전부이다. 그 선생님이 가르친 과목조차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선생님이 담임이 되지 않기를, 그 선생님의 수업을 듣지 않기를, 가능하면 우리학교를 떠나기를 간절히 기도한 기억만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작은 체구에 검소한 옷차림의 또 다른 선생님. 주 전공은 철학이지만 영어와 한문 과목을 담당했다. 아직 철부지였던 우리들에게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다. 지금 당장은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젠가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들의 미래를 진정으로 걱정해 주는 느낌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훗날 내가 교단에 서게 되었을 때 이 선생님이 한 말과 행동들이 자주 떠올랐다. 선생님은 젓가락보다는 조금 더 굵은 길이가 30cm쯤 되는 매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작은 막대를 교편으로 사용하였다. 수업의 분위기를 흐리거나 중요한 과제물을 소홀히 한 아이들에게도 알아들을 때까지 설득하고 여러 번의 기회를 주었다. 어떤 때는 선생님이 좀 따끔하게 벌을 주어 나쁜 습관을 일시에 고치도록 하지 않는 것이 답답하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가정 사정을 파악하여 때로는 형이나 동생, 삼촌이나 친척들의 이름까지 언급하며 열심히 공부할 것을 설득했다. 성적이 떨어진 아이들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표정을 잃지 않았다. “이 녀석! 이번 달에는 공부 열심히 안 했네. 손바닥 내라.” 하고는 작은 막대로 한두 차례 찰싹찰싹 때리는 시늉을 했다. 때리는 선생님이나 맞는 아이들이나 모두 표정이 밝다. 그리고 성적이 오른 아이들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껄껄껄 웃기도 하고 큰 소리로 나무라기도 하지만 꾸중을 하는 건지 농담을 하는 건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돌아서면서 선생님께 깊이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대신한다. 그 철없던 시절에도 우리끼리 “영어공부 좀 열심히 하자, 선생님께 너무 미안하잖아.”, “숙제 좀 잘해오자.”하며 서로 다짐하기도 했다.

40여 년 전 우리들의 고교시절에 경험한 뚜렷이 대비되는 두 가지 풍경을 떠올려 보았다. 아이들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시적으로 나쁜 행동을 정지시키는 효과나 수업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교육의 목표이다. 내적인 동기 유발이 미흡한 상태로 행동을 통제할 때 인간은 그렇게 순응적이지 않다. 매를 많이 든 선생님 때문에 열심히 공부한 기억이 없는 이유이다. 체벌이 열정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선생님의 권위로 인정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때리는 시늉만 한 그 선생님에게 손바닥을 가볍게 맞으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다음에는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최근에 우리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런 질문을 했다. ‘내가 어떤 행동을 결정할 때, 아버지의 엄함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 떠오르는가? 아니면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미안함이 먼저 떠오르는가?’ 90% 이상의 아이들이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대답했다. 엄한 체벌이 나쁜 행동을 제어하는 기능이 크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체벌은 단순히 물리적인 현상만으로 구분되지 않는 면이 있다.

20여 년 전 교사시절에 3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이다. 학기 초에 능력은 있지만 노력을 게을리 하는 한 아이와 약속을 했다. 매주 월요일 그 녀석의 생활계획표를 보고 가위표(×)의 개수만큼 종아리를 때리기로. 그리고 그 아이가 직접 만든 전용 막대를 책상 옆에 매달아 두었다. 월요일마다 한 주간 동안 자신의 공부 계획과 실천의 결과를 스스로 ○, × 로 표시한 계획표를 들고 와 약속을 지켜나갔다. 그해 말, 입시에서 그는 소위 말하는 명문대학 인기학과에 진학했다. 교육은 선생님과 제자라는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열정을 가지고 제자가 잘 되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의 어떤 방식에 대해 아이들은 체벌로 여기지 않고 사랑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시대가 많이 변하여 이제는 체벌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31조 학생의 징계 등에 관한 내용을 보면 학교의 장은 교육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학생에 대하여 학교 내의 봉사, 사회봉사, 특별교육이수, 1회 10일 이내 연간 30일 이내의 출석정지, 퇴학처분 등의 징계를 할 수 있다. 다만 퇴학처분은 의무교육과정에 있는 학생은 불가하다. 그리고 이러한 학생의 징계를 시행함에 있어 학교의 장은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훈육·훈계 등의 방법으로 하되, 도구, 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 라고 정하고 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학생 체벌 금지 조항인 것이다.

한 학급의 학생수가 60명을 넘는 등 열악한 교육여건에서 불가피하게 묵인되었던 과거의 지도 방법은 이제 벗어나야 한다. 경상북도의 경우 내년도 대부분의 학교가 학급당 학생수가 23~25명으로 대폭 감소되었다. 그리고 한 가구 한 자녀 시대에 아이들의 성장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이제 사회는 전문화, 개별화 되었다. 더욱 정교하고 세심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지도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명심해야 할 것은 체벌을 금지한다고 해서 엄격하게 해야 할 부분조차 방치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제 자식을 사랑하는 이는 그에게 종종 매를 댄다.”(집회 30,1), “매를 아끼는 이는 자식을 미워하는 자, 자식을 사랑하는 이는 벌로 다스린다.”(잠언 13,24) 이처럼 성경은 아이들의 훈육을 엄격하게 하도록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적에 대해서는 가혹할 만큼 엄하지만 정작 더불어 살아가는 중요한 덕목인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 약속에는 너무도 관대하다. 때로는 매를 드는 한이 있어도 정직, 질서, 배려 등 가치의 문제에 대해서는 엄하게 가르쳐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엄격함의 뒤에는 솔선수범하는 어른들의 태도와 헌신적인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체벌은 단순히 매를 드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서진다.”(집회 28,17)는 말씀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