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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
아름다운 여인


글 김남수 안젤라 | 수성성당

 

봉사자가 드문 시절이었다. 40대의 젊은 그녀가 경북대학교병원 원목실로 찾아온 것은 15~16년 전이었다. 둘이 짝이 되어 병실을 다니며 미사 안내와 기도 봉사를 했다. 병마에 시달리는 환우들을 보면서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라 때론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어느 날, 그녀의 삶에 거센 강풍이 불어와 가사도우미로 생활 전선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틈틈이 영어 공부도 하고 호스피스와 병원 봉사까지 했고, 불평 없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환우들에게 정겹게 다가갔다. 어려운 처지여서 단벌옷을 밤에 빨아 말려 입곤 했어도 아침마다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지 않아서 좋다고 한다. 젊은 여인이었기에 어찌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남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주어진 처지에 만족하며 남을 보듬고 사랑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기차 여행 중에 만난 남편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차를 타고 가다가 부부싸움 끝에 화가 난 남편이 그냥 내려놓고 가버렸는 데도 원망하지 않은 채 퇴근하는 남편에게 좋아하는 수제비를 해주며 마음을 풀었다고 한다. 남들이 보면 배알도 없나 싶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이 진정한 천생연분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남편 모습에는 세월의 흔적이 완연하지만 젊었을 때는 정말 멋있고 괜찮은 사람이었다며 자랑이 늘어진다. 슈퍼마켓을 운영할 때 두부가 언제 것이냐고 손님이 물으면 어제 것이라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사지도 않고 가버리니, 이웃 아주머니가 딱하게 여겨 당신은 장사를 그만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남을 속일 줄 모르고 바르고 진실하게 살았지만 결국은 슈퍼 운영의 미숙으로 수천 만 원의 빚을 지게 되었다. 빚쟁이를 피해 한티순교성지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기도하다 발길을 돌렸다고 하니 그녀의 고달픈 삶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삶의 고단함을 기도의 힘으로 위안 받으며 먼 훗날을 기약하지 않았을까.

시련과 고통의 무게는 다를지라도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이라는 불청객을 강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위안 받으며 주님께 기댈 수 있음은 우리 모두에게 가슴 벅찬 기쁨이 아닐 수 없다. 힘들고 지쳤을 때마다 손잡아 주시는 주님께 기대어 숱한 비바람을 견뎌준 그녀가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힘든 그녀를 위해 기도만 했을 뿐 따뜻이 다독여 주지 못한 것을 자책해 본다. 어느 날에는 물건을 사러 온 사람이 지갑을 둔 채 가버렸는데 형편이 어려운 처지의 남편이 그 지갑 속의 돈을 슬쩍 꺼내 써버렸다고 한다. 그것이 마음의 가시가 되어 남편 몰래 몇 차례 나누어 갚았다고 한다. 나의 잣대로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해 말 할 수 없었을 터인데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녀는 봉사자들 앞에서 웃으며 스스럼없이 남의 얘기처럼 한다. 누가 농담을 해도 그것마저 곧이곧대로 듣는 그를 보며 봉사자들은 한바탕 웃음꽃을 피운다.

중학교만 졸업한 그녀는 배움에 갈증을 느껴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합격하고 지금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학업에 대한 열망과 무지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으로 주부, 학생, 봉사자, 1인 3역으로 살아가는 그녀는 참으로 본받을 만한 사람이다. 지금도 남편은 아내를 무시하면서 “좀 더 배우기는 했지만 아직도 조금은 무식하다.”고 놀려 댄다지만 그 말은 아내의 부단한 노력을, 그리고 그 대가를 은근히 칭찬하는 말일 것이다. 마음의 때가 묻지 않은 그녀를 보면서 나는 얼마나 가식적인 사람인지, 보기 좋게 겉모습으로만 포장한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꿈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학업에 매진하며 오랜 세월 묵묵히 봉사하는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가치 있고 보람되게 꾸려가니 정말 칭찬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딸로,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정말 순수하고 꾸밈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호스피스와 병원 봉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그녀는 꽃 향내를 머금은 진정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와 함께한 수많은 시간들이 나에게도 삶의 기쁨과 보람으로 켜켜이 쌓여 낭비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 온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