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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 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 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 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 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 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 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 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9월 3일 연중 제22주일 : 마태 16,21-27.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21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제자들에게 알리셨습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엄청난 말씀의 위력을 지니신 분, 사랑과 용서를 베푸신 분,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분. 그분이 잡혀 죽는다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말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이 이해되십니까?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그렇게라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이제 베드로는 사탄으로 몰리게 됩니다. 주님께 나쁜 일이 닥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사탄이란 극단적인 말을 주님께로부터 듣게 됩니다. 말을 깨닫지 못하는 우둔한 사람이라는 정도의 말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완전히 주님의 반대파이고 사악함의 극치를 달리는 사탄이 되어버렸고,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한순간에 가장 총애 받고 가장 신임을 받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치게 까칠한 성격을 지니셨고 아주 다혈질이거나 아니면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인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이유로 베드로를 사탄으로 몰아 붙였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탓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수난과 죽음은 나에게 합당한 것이다. 지상에 얽매인 생각이 너의 판단력을 흐리고 결국 오류로 이끄는구나. 너의 모든 인간적인 생각들을 버리고 내 아버지가 마련하신 계획에 따라 내 말을 들어라. 그러면 너는 이 죽음이야말로 나의 영광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너는 수난이 나에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지만 내가 이 방식으로 구원계획을 이룰 수 없게 하는 것은 사탄의 계략이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베드로는 사람의 일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람이기에 사람의 일만 생각한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사람이지만 하느님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베드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람의 생각을 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삽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라 나선 우리가 사람의 생각만 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산다면 우리도 사탄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목숨을 잃어도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사탄이 되고 제자가 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 마태 18,15-20.

글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가르멜수도회 한국관구장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 18장 15절에서 20절까지의 내용으로,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만일 그 말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다시 타일러라.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처럼 여겨라.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죄를 지은 당사자를 위한 배려와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잘못한 당사자가 뉘우쳐 그간의 관계를 회복하고 바른 사람으로 돌아설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최대한 배려를 하며 형제적인 애덕의 마음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관통하는 주요 개념 중에 ‘리브(rib)’와 ‘미쉬팟(mispat)’이라는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이는 두 사람 사이에 정의가 무너졌을 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시도되는 행위입니다. ‘미쉬팟’은 ‘법정 소송’을 가리키는 말로, 어떤 사람이 잘못했을 때 그의 잘못에 대한 시시비비를 법정에서 가리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 방법은 잘못한 당사자의 행위를 재판관 앞에서 분명히 가림으로써 그가 처벌을 받고 벌금을 물어서 손해를 받은 당사자의 권익이 회복되는 것을 지향합니다. 쉽게 말해 이 방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식으로, 죄를 지은 당사자가 범한 손해 만큼 법정을 통해 처벌을 받게 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자비의 논리가 없습니다. 죄를 지은 당사자는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하며, 소송의 당사자인 두 사람의 관계는 이로 인해 결정적으로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성경에는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이 있는데, ‘이의 제기’를 의미하는 ‘리브’가 그렇습니다. 이 문제 해결 방식은 죄를 짓거나 손해를 끼친 사람을 법정에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를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일깨워주며 그가 회심해서 돌아설 수 있도록 권고해주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잘못한 사람의 처벌을 원치 않을뿐더러, 더 나아가 그의 잘못으로 인해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의 제기’에는 잘못을 범한 사람을 향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그의 부족함을 끌어안는 깊은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구원 역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비롯해 인류와의 관계에서 보이신 방식은 ‘미쉬팟’이 아니라 ‘리브’였습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맺은 계약의 관계를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러 예언자를 보내 ‘이의 제기’를 하셨지만 결코 그들의 멸망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와 당신과 맺은 깊은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당신 안에서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분의 계속된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마침내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최종적인 ‘이의 제기’를 하셨습니다. 이로써 그분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죄의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로 하는 인류는 예수님을 통해 하신 하느님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붙잡아 모욕하고 무참히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의 잘못을 대신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이의 제기를 받아 안고 우리의 악을 구원의 길로 바꾸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과 인류 사이에 어그러졌던 관계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을 통해 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이의 제기에 응답하도록, 그분을 향해 회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를 통해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을 단죄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그들과 화해하는 가운데 그들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끌어안도록 초대하십니다.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 루카 9,23-26.

글 김창현 베드로 신부 | 죽전성당 보좌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해마다 9월이면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교구마다 혹은 본당마다 순교자들의 신앙과 모범을 본받고자 많은 노력들을 기울입니다. 교회가 처음 생겨날 때에도 그랬듯이, 한국천주교회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흘림 위에 굳건히 세워졌습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온 교회의 가르침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가르침은 당시에는 혁명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인간의 기준과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 순교자들의 의연함과 당당함이 돋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순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후손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분들이십니다. 진정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켜냈던 신앙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해봅니다. 그분들이 원하셨고 또 관심을 가진 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와 당대 사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정의와 평화, 평등과 자유, 나눔과 섬김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고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양떼들을 위한 목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시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뛰어난 인품과 능력 때문에 많은 유혹을 받았음에도 불굴의 의지로 순교하심으로써 모범이 된 첫 사제였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이 땅에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 애를 쓰셨고, 사제 영입 이후로 복사와 교리 봉사에도 투신하셨습니다. 특별히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위해 〈상재상서〉라는 유명한 호교문을 작성하시기도 했습니다. 또한 동료 순교자들은 각계각층의 다양한 분들이며, 한 분 한 분마다 그 사연이 기구합니다. 평신도들이 일구어 낸 한국교회의 산 증인들입니다. 이와 더불어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아무런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순교의 영광을 받으신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존재입니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들만 해도 이미 적지 않은 숫자인데, 하느님만이 아시는 숭고한 죽음은 얼마나 더 많았을까요? 그분들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복음의 가치는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몫은 그분들로부터 받은 신앙의 유산을 잘 지키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순교’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지금 여기의 현실에 맞게 보존하고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통용되고 있던 부정과 부패에 맞서고 생명과 평화를 먼저 선택하며, 정의와 자유를 부르짖고 가장 가난한 이들을 잊지 않는 노력들이 우리가 순교자의 후손임을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비록 어렵고 불편하지만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자리이고, 잃는 만큼 소중한 것을 얻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 마태 20,1-16.

글 반 유딧 수녀 |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경산 베네딕도성경학교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

오늘의 말씀은 ‘따름과 보상’이란 전(前) 문맥과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받을 상에 대한 말씀 이후에 하늘나라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보상에 대한 새로운 의식의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늘 나라는 통상적이고 상식적이어서 ‘아!’ 하고 쉽게 공감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되는 나라입니다.(참조 19,30; 20,16) 감히 누가 하느님께 수고에 대한 보상을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토당토않게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보상 개념이 오늘의 말씀으로부터 도전을 받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로부터 시작됩니다.(1절) 포도밭 주인에 의해 선택된 일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오전에 온 일꾼과 오후에 온 일꾼들입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난 뒤에 모든 일꾼들은 관리인으로부터 품삯을 받습니다. 일꾼들에게 노동의 대가는 품삯으로 환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오후 5시에 와서 일한 사람에게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9절) 이 모습을 지켜보는 오전과 오후의 일꾼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오후의 일꾼들은 “아무도 자신들을 사지 않아” 온종일 인력시장에서 서성이던 마음이 고단한 사람들입니다.(7절) 오후 5시가 되었을 때 포도밭 주인은 정당한 품삯을 약속하며 자신의 포도밭에 그 사람들을 불러 주었습니다.(8절) 세상의 경제논리는 5시까지 일자리를 얻지 못한 오후의 일꾼들을 능력도 없고, 무가치한 사람들로 평가합니다.(참조 19,13) 그리고 그들의 품삯은 노동에 비례한 시급으로 계산됩니다. 그러나 포도밭 주인은 능력과 가치를 따지지 않고, 마음이 고단한 그들을 자신의 포도밭에 고용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의 ‘정당한 품삯’은 노동의 양에 의한 시급이 아니라 한 노동자가 가족과 생활할 수 있는 하루의 생활비인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9절) 오후의 일꾼들은 주인의 자비에 감동하며 비록 자신들이 하루의 노동을 다 채우지 못했어도 얻게 된 품삯에 감사하며, 행복이 넘쳤을 것입니다.(9절) 그리고 다음에도 불러만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노라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한편 이른 아침에 온 일꾼들은 뙤약볕 아래서 온종일 고생한 자신들의 수고를 생각하며, 오후의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당연히 자신은 그들보다 “더 받으려니” 생각했습니다.(9-10절) 그들은 노동의 대가를 주인과의 합의가 아니라 이웃과의 비교와 차이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후의 일꾼보다 더 받지 못한 자신의 이기적인 기대 때문에 불평과 분노에 잠깁니다.(11절) 그들의 불행은 합의된 임금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1시간을 일한 오후의 일꾼들과 “온종일 고생한 자신과 똑같이 대우”한 것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됩니다.(12절) 너와 나를 차별하려는 특권의식은 불공평을 주장하는 그 속에 감추인 질투이며, 하늘 나라를 배척하는 폭력이 됩니다.(참조 루카 15,25-32) 너와 내가 함께 나누지 못하는 기쁨은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포도밭 주인은 감사하는 오후의 일꾼들과 불평하는 오전의 일꾼들에게도 똑같이 자비하십니다. 그분은 질투하고 불평하는 오전의 일꾼도 “친구”로 받아들이며, 당신의 것을 당신 뜻대로 베푸시는 주권자이십니다.(14절) 오전의 일꾼은 5시에 온 일꾼들이 받은 한 데나리온 이상의 것을 받지 못했다 하여 불행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포도밭에서 온종일 기쁨과 평화 가운데 일할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후의 일꾼들이 나의 부모, 형제였다면 나와 똑같이 대우받은 품삯에 함께 기뻐하며 주인의 자비를 칭송하지 않았을까요? 오늘의 말씀에서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나의 심보(?)를 들여다보며, 하느님 앞에서 나는 첫째일까 아니면 꼴찌일까를 묵상해봅니다. 꼴찌가 첫째 되는 것을 바라보며 손뼉을 쳐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늘 나라의 참된 시민이 되겠지요. “주님, 당신은 어지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크십니다.”(시편 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