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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이야기


글 박경현 프란치스코 | 포항 오천고등학교 교장, 진량성당

 

수학능력시험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딸을 둔 한 아주머니가 성당의 신부님을 찾았다. 수능에서 능력이상의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미사를 한 번 진하게 봉헌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예물로 준비한 봉투를 두고 나갔다. 그분의 태도로 보아 가톨릭 신자 같지는 않은데 두고 간 봉투가 제법 두툼했다. 신부님은 자녀를 위한 그분의 애틋한 심정을 대신하여 정성껏 기도했다. 수능이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아주머니가 다시 신부님을 찾았다. 처음과는 완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다짜고짜 신부님께 미사예물로 드린 그 돈을 돌려달라고 했다. 신부님의 기도가 아무 효험이 없었다는 것이다.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인지 실화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신부님을 푸닥거리하는 무당이나 용한 점쟁이 중의 한 명으로 생각한 것 같아 쓴웃음이 났다. 하지만 신앙 안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 아주머니의 대응 방식을 마냥 웃어넘길 자격이 있는지 두려워진다.

수학능력시험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라파엘의 불안은 점점 더 높아져 간다. 대학입시를 멀리서 바라볼 때에는 인생에서 수시로 찾아오는 흔한 장벽 중 하나쯤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임박하니 예상보다는 무겁고 엄중하다. 인정하는 순간 더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한 상황에 대해서는 회피할 핑계나 합리화할 근거를 찾거나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결정을 미루게 된다. 어른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도 직접 벼랑 끝에 서 보기 전까지는 그 말의 의미를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은 결국 마주하게 되고 그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의 준비가 부족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조급함과 아픈 후회로 무력감에 빠질 때 마지막 수단으로 엄마의 잔소리로 여기며 외면하던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된다. 고3이 되면서 ‘입시 앞에 무력한 하느님도 수험생의 처지는 다 이해하실 것’이라는 논리로 주일미사도 잘 지키지 않더니 갑자기 평일미사까지 찾는다. 인연이 있는 신부님을 찾아가 안수를 받기도 하고 틈만 나면 성모상 앞에 앉아 노력한 이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오랫동안 가슴에 품은 대학에 진학을 할 수 있다면 열심히 공부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꼭 살겠다고 거래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토록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시험의 순간 어떠한 효험도 느낄 수가 없다. 짓누르고 있던 긴장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희미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라 시험지 답안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일도 생기지 않았다. 뚫어지게 문제지를 응시해도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는 혼돈의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나만의 하느님의 목소리도 없었다. OMR카드에 표기하기 위해 컴퓨터용 수성사인펜을 들고 아무리 기다렸지만 내 손을 정답으로 이끌어 주는 하느님의 손길은 없었다. 시험이 종료될 때까지 긴장, 갈등, 불안, 초조, 두려움이 평소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줄어든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고 나에게만 은밀히 일어난 기적은 끝내 없었다. 오히려 더 많은 실수가 있었고, 시간이 부족하여 찍어서 표기한 문제들은 수학적 확률보다 적중률이 더 떨어졌다. 시험을 마친 라파엘은 실망과 분노 섞인 음성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나 이제 성당 끊어야겠다. 아무 효력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나도 할 만큼 했는데….”

나는 눈치를 살피며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이렇게 긴장된 시험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프지 않고, 교통사고도 당하지 않고 생각해 보면 기도의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닌데.” 라파엘은 훈계처럼 들리는 내 말에 짜증 섞인 음성으로 “그건 성당에 안 다니는 아이들도 다 그렇던데 뭐.”, “네 말이 맞다. 하느님은 성당에 다니든 안 다니든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충분한 사랑을 내려 주신다. 하지만 차이점은 성당에 안 다니는 아이들은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힐끗 눈치를 보니 무관심한 척 하지만 내 말을 듣고 있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더 많은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축복을 알아차리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삶의 방향이 달라지거든. 라파엘이 이번 시험의 결과에 불만이 많겠지만 하느님은 실패를 통해 소중한 의미를 절실하게 깨닫도록 기회를 주시는지도 모르잖아.” 라파엘은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인생을 좀 더 살아가다 보면 분명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라 믿는다.

성전을 건립하는 일은 길고도 힘든 여정이다. 막대한 예산을 확보하는 일은 많은 수고가 동반되는 만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전건립 기금모금을 위해 성물판매를 했을 때의 일이다. 필리핀에서 값싼 묵주를 구입하여 교구의 각 본당을 방문하여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산술적 계산에 의하면 현지에서 500원에 구매할 수 있는 묵주를 포장을 한다 해도 원가가 800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성전건립이라는 선한 목적에 비하면 2,000원 정도면 대부분의 신자들이 구입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가격을 결정했다. 당시 우리 교구의 신자 수는 50만 명 정도였고 주일미사 참례 비율이 60% 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30만 명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20,000개 정도의 판매는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3,000만 원 이상의 기금을 마련한 것처럼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일사천리로 필리핀을 다녀왔고 포장상자를 만들고 안내 문구를 붙이기 위해 많은 신자들이 몇 개월을 모여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20,000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큰 숫자인지를 처음 알았다. 포장제품을 담은 박스가 창고에 가득한 것을 보고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성껏 포장을 하여 겉보기에는 나쁘지 않았지만 제품은 조잡하고 허술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업이라는 대 전제가 있기 때문에 수긍해 줄 것이라 확신했다. 판매 조를 편성할 때에도 연세가 높으신 분들을 포함시켜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도록 세심한 작전을 세워 각 본당으로 출발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우선 판매량이 기대에 턱없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구매한 분들의 불평이 끊이질 않았다. 포장을 풀자마자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상품의 수준이 터무니없다며 서운한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교우도 적지 않았다. 더 큰 후유증이 발생하기 전에 서둘러 판매 활동을 중지했다. 우리들은 크게 낙담했고 쌓여 있는 묵주 박스를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단순히 경제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책임에 대해 교우들 간의 갈등으로 번져갈 조짐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우리는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우선 우리들의 태도를 바꾸자고 했다. 성전 건립이라는 명분은 당당하지만 더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신자들에게 다가가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다른 설명 없이 원고를 진심을 다해 읽어 드리며 우리들의 마음을 전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가난한 농촌 본당에서 성전을 건립하고자 합니다. 성전건립기금으로 2,000원씩 봉헌해 주신다면 작은 보답으로 묵주를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성당의 재정이 열악하여 필리핀에서 한 개에 500원에 구입하여 저희들의 마음을 모아 예쁘게 포장했지만 조잡한 제품입니다. 돌아서면 금방 줄이 끊어지거나 십자가가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이후 판매도 순조로웠고 불평도 접수되지 않았으며 묵주를 받아 가면서 모두가 감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도 금전보다 더 큰 깨달음을 주신 주님을 찬미하게 되었다.

예비신자 교리봉사를 할 때마다 확인해보는 일이다. 미사 참례를 처음 경험한 사람들에게 소감을 물어보면 이구동성으로 ‘미사 중에 너무 자주 일어서서 불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도는 본래 서서 하거나 꿇어앉아서 해야 하는데 틈만 나면 앉도록 배려한다.”는 설명을 해주면 다음 주 같은 질문에 “미사 중에 자주 않도록 해줘서 고마웠다.”며 완전히 반대의 반응이 나타난다.

학교에서 모든 학부모들은 생각이 다른 자식들 때문에 속이 상하다고 하소연을 한다. 그리고 만나는 부부들마다 변화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배우자를 탓한다. “사람들은 본래 다 다릅니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태도, 같은 상황이라도 받아들이는 느낌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남녀의 차이는 호랑이와 나비만큼 다르다고 심리학자들이 말했습니다. 가족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생각이 일치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며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오늘 저녁 가족의 얼굴을 바라보면 아무도 변한 사람은 없지만 고맙고 사랑스러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나 내 주변의 여건은 내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바뀌지 않는다.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행복해지고 세상을 바꾸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