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로그인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와 영화제


글 한승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영화공부를 할 때 반 친구들끼리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인데 너무 바빠서 영화 볼 시간이 없다.’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새로 개봉한 어떤 영화를 보았냐고 선생님이 물어보면 거의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바쁘고 준비할 것도 많았다. 더욱이 미국영화의 제작 스타일을 주로 공부하다 보니 한국영화를 접할 기회는 상대적으로 더 없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우리의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서 ‘와’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영화의 스토리는 단단해졌고 장르 또한 매우 다양해졌다. 촬영 기술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투자되는 비용과 비교하면 열등한 환경에서 굉장히 좋은 영상이 제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HBO(Home Box Office, 미국 케이블 TV 민영방송)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의 경우 1회 제작비가 우리나라 영화 한 편 수준에 달하며, 매회가 영화와 같은 영상미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나라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만들어내는 드라마도 그에 못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해외의 유명한 영화제에서 우리나라 감독들이나 배우들이 수상을 하고 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나, 촬영할 때 배우들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면 ‘박찬욱, 김기덕’ 감독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그들의 작품에 대한 호평을 쏟아냈다.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권 국가에서 온 친구들은 한류열풍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국이나 유럽 친구들까지 좋은 평가를 해주니 우리나라 영화가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으쓱해지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영화의 수준은 세계에서 인정할 만큼 뛰어난 발전을 이루었고 지금도 계속해 나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 해외에서 인정받는데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영화를 만들다보니 인정을 받아 상을 타는 것이 아니라 수상하기 위해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다.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가 ‘한국이 세계 몇 위’이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유난히 강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정신의학자인 이무석 박사(72세)와 이인수 박사(45세)는 『누구의 인정도 아닌』이란 책에서 ‘인정중독’이라는 주제를 다뤘다. 임상에서 만난 많은 환자들이 겪는 정신적인 문제의 뿌리에는 결국 남에게 인정받는 것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인수 박사는 우리나라가 그동안 압축성장을 하면서 다들 성공만을 향해 달려왔고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의 기준을 맞추고 인정받으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 우리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일 자체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것에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인정을 받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우스개 농담은 인정받으려는 과도한 욕구가 인정받고 있다고 여겨지는 타인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연결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러시아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1971년~ )은 어릴 적 단 한 번도 국제적인 콩쿠르에 나간 적이 없다. 물론 6살 때부터 신동이라 불리고 13살 때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쇼팽의 콘체르토를 녹음한 독보적인 실력을 보유하기도 했지만 만약 그가 한국에 있었다면 그것만으로 인정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주위로부터 당장 세계적인 콩쿠르에 출전해 세계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강요당하지 않았을까? 얼마 전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앨범이 동나고 연주회가 매진되는 것이 그의 음악적 아름다움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는 것에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인 것 같아 씁쓸하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 “이번에 성적이 오르면 뭐 해줄 거예요?”라며 흥정을 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음 시험에 성적이 오르면 자신이 원하는 장난감 등을 사주시겠다는 약속을 부모님에게서 받아낸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다시 내게 되물으셨다. “네가 공부를 잘하면 너한테 도움이 되니? 아니면 나한테 도움이 되니?” 생각해보니 어쨌든 나한테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저요.”라고 대답했더니 어머니는 “맞지. 그런데 네가 공부 잘 한다고 해서 내가 왜 다른 것을 더 해줘야 하느냐?”라고 하셨다. 그 시절 어머니보다도 나이가 많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였다. 물론 다른 부모님들처럼 무언가 동기가 될 만한 선물을 주셨다고 해도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을 만큼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고 모든 일을 대하는데 있어 기본적인 마음자세가 된 듯하다. 그리고 여동생 또한 나의 두 조카에게 그대로 하고 있다. 물론 조카들이 납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가장 좋아하는 연중평일미사 감사송이다. 경문을 외울 때마다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기억하게 한다. 우리가 신앙이나 교회에서 맡은 소임마저 그 가치를 하느님께로부터 인정받고, 교회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에서 찾을 때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욕심으로 채워지고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 우리와 우리 자신의 일은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하느님의 선물이니 찬미와 감사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