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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마당1
한티 가는 길


글 구희서 안젤로 | 대명성당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극심했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믿음 하나를 붙들고 여러 피난처를 찾아 헤맸다. ‘한티 가는 길’은 천주교 박해 때 신앙선조들이 믿음의 자유를 찾아 걸었던 길이다. 칠곡군 가실성당에서 한티순교성지를 잇는 45.6km의 길은 모두 다섯 구간으로 나뉘었다. 일행은 신앙선조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길을 나섰다. 여정을 통해 스스로의 미지근한 신앙심을 일깨우는 동시에 보다 나은 신앙인의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서다.

첫 번째 구간은 ‘돌아보는 길’이다. 출발지인 가실성당은 대구대교구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이다. 천주교 특유의 고딕양식 건물에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일행은 성전에서 기도를 올린 뒤 목적지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딛는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 금세 눈이라도 쏟을 기세다. 널따란 길과 함께 펼쳐진 들판과 하늘, 목적지를 향해 걷는 이들의 뒷모습이 느림과 비움이란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산길에 접어들자 아름드리 소나무가 품을 열어 순례객을 맞는다. 숲은 호젓하다. 이따금 들리는 바람소리, 새소리뿐. 우거진 수풀이 내뿜는 향기가 몸속 깊이 파고든다. 전망대에 이르자 겨울 산하가 눈을 채운다. 흰 눈이 내려쌓인 자연의 모습이 무척 포근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이 건네는 힘겨움과 길 위에서 얻는 마음 속 평화를 즐긴다.

길은 다시 이어진다. 숲길이 끝나자 넓은 길이 나왔고, 조금 더 걷자 작은 저수지가 있는 도암마을에 닿는다. 선인들은 이곳에서 가마를 열고 옹기를 구웠다고 한다. 그들은 거창한 데서 행복을 찾기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소박한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런 삶도 그리 길지 않았다. 관아에 발각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히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만 것이다. 마을 뒤쪽에 공소가 있다. 낡은 건물 앞에 서 있는 성모상에서 겸손과 순명의 극치를 깨닫는다. 공소를 지나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목적지다. 신나무골 성지는 한국에서 충청도 배론과 함께 가장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영남지역의 첫 천주교회의 요람지다. 신자들이 나무 아래 움막을 짓고 살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성지를 에두르며 묵상과 기도로 신앙인의 자세를 가다듬는다.

두 번째 구간은 ‘비우는 길’이다. 한동안 쉬어서인지 걸음이 가볍다. 신앙선조들이 지난 길은 한결같다. 구석지고 후미진 산길은 남의 눈을 피할 수 있어 자유롭고 유연했다. 숲속 길을 따라 표지석과 표지판, 리본이 선명하다. 숲이 이토록 따뜻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꼭 그리스도인의 감정 때문만은 아닐 터이다. 세상에 대한 이런저런 허튼 생각만 걷어내면 숲은 언제나 고요함과 편안함을 안겨준다. 이 길은 걷는 속도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순례길이란 의미를 넘어 몇백 년 이어진 신앙선조들의 자부심과 정체성이 길섶에 넘친다. 다소 지루하던 산길은 댓골지를 지나 양떼목장에 이르러 시원한 전망을 펼쳐 놓는다.

세 번째 구간은 ‘뉘우치는 길’이다. 다섯 개의 구간 중 최고의 경관을 자랑한다. 정자, 호수, 재(嶺) 등등 볼거리가 넘쳐나고 코스의 변화도 가장 리드미컬하다.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이 길에서 내가 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걸었는가를 되돌아본다.

길은 네 번째 구간 ‘용서의 길’로 이어진다. 긴 호흡으로 열어가던 산길은 칠곡 동명면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다. 동명성당은 신자들이 모여 교우촌을 이룬 곳이다. 성당을 나와 5분쯤 걸으면 동명저수지가 나온다. ‘한티 가는 길’이 개통되면서 산 아래쪽 산책로가 열렸다. 그 덕에 주민들은 수변공원에서 휴식과 함께 일상을 재충전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면 고통이 뒤따른다.’고 했다. 원한이나 증오, 복수심은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며 괴롭히기 때문이다.

마지막 구간은 ‘사랑의 길’이다. 진남문을 지나 굽이굽이 고갯길을 오르면 눈앞에 목적지가 보인다. 한티순교성지는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역으로 꼽힌다. 신앙선조들이 몸을 숨긴 곳이자 처형당한 곳이며,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순교성지이기 때문이다. 선인들은 이곳에서 그릇을 구워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순교의 칼날은 이곳마저 피해가지 못했다. 관아의 포졸들이 들이닥쳐 철저히 파괴하고 짓밟아 수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여정은 한티순교성지에서 끝났다. 길의 전체 테마는 “그대 어디로 가는가?”이다. 100리가 넘는 길을 걷는 동안 이 물음을 수없이 던지며 많은 답들을 떠올렸다. 신앙선조들은 한 발 재껴 디딜 곳조차 없는 암울함 속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믿음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의 신앙증거가 먼 시간을 돌고 돌아 후손들의 가슴 속에 신선하게 녹아든다. 또한 안주하고 틀에 박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깊은 성찰의 깨달음을 안겨준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만나려는 주님보다 주님의 참된 모습을 닮도록 하는 데 더 갈고 더 닦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