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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복음 나누기 7단계와 주일 복음 묵상


박광훈 신부, 윤주현 신부, 김창현 신부, 반 유딧 수녀

 

매주 하는 복음 나누기 7단계

 

1 주님을 초대한다.

 “기도로 이 자리에 예수님을 초대해 주십시오.”

 

2 말씀을 듣는다.

“ ― 복음 ― 장을 펴 주십시오. 어느 분이 ― 절부터 ― 절까지 읽어 주십시오.”(다 읽고 난 후 잠시 침묵한다.) “다른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3 복음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각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짧은 구절을 선택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듯이 세 번씩 읽어 주십시오. 읽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켜 주십시오.” “어느 분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4 침묵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3분 동안 침묵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5 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이제 각자 주님께로부터 들려온 말씀을 함께 나눕시다. 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는지, 그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6 모임에서 해야 할 활동에 대하여 토의한다.

“지난 번 모임에서 결정했던 사항을 어떻게 실천했는지, 그 결과와 개선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이번에는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 주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7 자발적으로 함께 기도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자유롭게 기도합시다.”

 

 

11월 5일 연중 제31주일 : 마태 23,1-12.

글 박광훈 안드레아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양성자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가르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냉엄한 공격을 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즉 예수님은 그들이 충실한 율법 해석가들이지만 충실한 실행자들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들은 위선자들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위선을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원한다면 거울 앞에 1분을, 영혼 앞에 5분을, 하느님 앞에 15분을’ 서라! 과연 우리는 어떠합니까? 모르긴 해도 아마 우리는 반대일 겁니다. 자주 거울 앞에 한참을 서 있는 우리 모습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에 치중하고 있는지를 알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비판하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바로 ‘남에게 보이는 나’에 충실한 사람, 곧 지금의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자신을 온전히 투자하고 있습니까? ‘보이는 나’입니까? ‘내 속의 나’입니까?

2001년 6월 24일 부제품을 받고 난 후 저는 많은 강론을 썼습니다. 책 몇 권은 될 것입니다. 참 어렵게 쓴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쓴 것도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가 나의 강론대로만 살았어도 정말 성인이 되었겠다.’는 것입니다. 제 강론 안에 들어있던 주제들, 그러니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전심으로 기도하고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들을 과연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는지 부끄러워졌습니다.

강론을 준비할 때의 어려움은 복음의 주제가 쉽게 떠오르지 않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건 복음의 주제는 쉽게 떠오르는데 그 복음대로 살지 못할 때, 그럼에도 그 주제로 강론을 해야 할 때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몇 가지 원칙을 정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 정말 마음에도 없는 강론은 하지 말자. 둘째, 하나마나 한, 두루뭉술한 강론은 하지 말자. 그리고 셋째, 나도 못 지킬 그런 강론은 하지 말자.”였습니다. 이 중 제일 어려운 게 세 번째입니다. 솔직히 저 자신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했던 말이 어디 한두 마디였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이 말씀에 제가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이 실천을 못 따라 가는 것은 매일 누군가를 가르치고 복음을 풀어 전해주어야 하는 저 같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바리사이파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말한 것은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하게 될 때라도 그때는 최대한 겸손하게 말하겠습니다. ‘어렵지만 함께 노력하자는 식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들, 남들에게 지키기를 원하고 가르치는 그것을 우리부터 지켜 나갔으면 합니다. 솔선하고 모범을 모이는 생활들이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값진 것이겠지요. 함께 노력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러한 힘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11월 12일 연중 제32주일 : 마태 25,1-13.

글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가르멜수도회 한국관구장

1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고 전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 신부는 약혼을 한 다음, 일 년 정도를 친정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러다 혼인예식을 하게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의 집으로 갔고 신부 또한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신랑 일행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랑은 자신의 친구와 신부, 그리고 신부의 친구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혼인예식을 치렀습니다. 통상 신부와 함께 온 축하객들은 잔치가 끝날 때까지 신랑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당시 풍습에 따르면 신부의 친구들이 신랑의 집까지 들고 갈 등불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결례였다고 합니다. 등불을 준비하지 않으면 이후에 있을 혼인잔치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등불을 준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열 처녀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당연히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당시 혼인잔치는 밤에 진행됐기 때문에 밤새도록 불을 밝힐 기름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소개된 혼인잔치 비유에서 신랑은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열 처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합니다. 열이란 숫자는 전체를, 주님의 신부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나간다’고 하는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계속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나가는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느님이시며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이 세상에서 천상 본향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의 최종 목적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과 함께 영원한 삶을 즐기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 처녀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이 등잔이란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몸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기름이란 우리 존재를 비춰주는 것, 하느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 바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때마다 이 기름은 더욱 많아지게 됩니다.

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렸지만 늦도록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그분은 바로 형제자매의 얼굴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특히 보잘 것 없는 이웃의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분이 늦는 것은 우리가 사랑을 향해 회심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처녀들은 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어두움 가운데서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 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소서!” 하고 외쳤던 분, “그래,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대답하신 분이 드디어 오십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것, 바로 여기에 우리 삶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신랑이신 주님을 맞으러 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준비에 따라 우리에게는 기름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름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이 사랑의 응답은 남이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고 했을 때, 줄 수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기름을 얻기 위해 필요한 시간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이야말로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기름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그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 항상 깨어 있도록 오늘도 권고하십니다. 사실 언제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그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이고, 그리고 오늘만이 주님과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기름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기름을 잘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우리는 현재를 잘 살아서 주님의 오심을 위해 잘 준비하며 좋은 기름을 마련해야겠습니다.

 

 

11월 19일 연중 제33주일 : 마태 25,14-30 또는 25,14-15.19-21.

글 김창현 베드로 신부 | 죽전성당 보좌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복음 묵상 중에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아이들과 청년들이 생각났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면서도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상당히 많은 해석을 갖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보통 이 비유는 하느님께로부터 각자가 받은 탈렌트가 무엇인지를 잘 발견하고 그것을 잘 사용해서 풍성한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복음을 바라본다면 조금은 불편한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깁니다. 관건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르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과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은 각각 받은 만큼 더 벌었습니다. 하지만 한 탈렌트를 받은 종은 아무것도 더 벌지 못한 채 주인으로부터 꾸지람을 듣습니다. 아무것도 벌지 못한 종은 과연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너무 적게 받았다는 데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고, 주인을 무서워했을 수도 있고, 위험한 것보다는 안전한 것을 더 좋아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자꾸만 숨으려고 하고 겁을 먹습니다.

과연 꾸지람을 들은 종의 행동에 대해 단순히 그 종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을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물론 자신을 자주 남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의 의도를 오해하고, 모험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각자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 탈렌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사용하거나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받아들이기도 전에 먼저 사회로부터, 사람들로부터 들어왔기에 알 틈이 없습니다. 받은 만큼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벌어들이기를 강요당합니다. 남들을 따라가고 더 앞서라고 합니다. 직접 부딪히고 직면하기 보다는 가급적 피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욕심이 누군가를 겁쟁이로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요? 세상물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능력을 주셨고, 동시에 한계도 함께 주셨습니다. 영성심리학자 안셀름 그륀 신부는 이 비유에서 자기 자신을 평가절하하고 열등감에 빠진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셨을까요? 자신의 가치를 어느새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기 위해, 이 비유로 새로운 눈을 뜰 수 있도록 자극을 주신 것은 아닐까요?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 공동체의 복음서라고 불립니다. 어떤 모습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탈렌트의 비유는 타인의 판단과 욕심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소중함을 잃어가는 작고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격려하자고 우리를 초대하는 듯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공동체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노력해보자고 우리에게 제안하는 듯합니다.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그제서야 우리가 건네는 사랑은 훨씬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11월 26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 마태 25,31-46.

글 반 유딧 수녀 | 툿찡포교베네딕도회 대구수녀원, 경산 베네딕도성경학교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25,34)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음을 경축하고 고백하는 한편, 언젠가 우리도 하느님 앞에 서서 살아 온 모든 날들에 대한 셈을 바쳐야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결실의 날이 되면 한 장의 나뭇잎조차 지나온 시간의 얼굴이 있듯이 내게 주셨던 하느님의 시간은 내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결실을 맺고 있을지 오늘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그 날을 생각하며 왕이신 그분 앞에 미리 서 보는 날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은 ‘깨어 있어야 함’(24장)과 ‘하늘나라 비유’(25장)를 통해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이들의 자세를 보여주는 전(前) 문맥에 이어서 ‘최후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모든 민족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32절), 그때 주님께서는 나에게 오른쪽과 왼쪽 중에서 어느 쪽으로 가라고 하실까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벌을 받는 곳”(46절)은 그 사이에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는”(루카 16,26) 심연이 가로막고 있는 장소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벌은 내가 살아온 삶의 순간순간에 행한 행위가 놓여 이루어진 다리(架橋)로서 선을 행한 사람은 선의 다리를 건널 것이고, 악을 행한 사람은 악의 다리를 건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 앞에 모인 사람들은 똑같이 “저희가 언제 주님께 … 해 드렸습니까?”, “저희가 언제 주님께 …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합니다.(37-40절, 44-45절) 그때 주님은 “너희가 내 형제들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40절)라고 하십니다. 오른쪽뿐만 아니라 왼쪽의 사람들도 가장 작은 이들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더라면 지체 없는 선행을 베풀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가장 작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몰랐기에 더 놀라워하는 것이 아닐까요.

선행은 그가 ‘누구’이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의 ‘작음’을 채워 주려는 측은지심(惻隱之心)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형제’로 받아들일 때 이루어지는 행동입니다. ‘작음’을 업신여기는 교만과 타산적인 마음은 형제자매들을 ‘세상 속의 사람들’이라는 집합체로 만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분명할 때만 행동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선행이 드러날 때 가치를 발휘하지만 보이지 않고 감추어진 것은 경제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사회복지단체를 찾는 이들은 가져간 물품을 놓고 사진을 찍으며 자신들의 자선을 자랑하며 알립니다. 이렇게 권력, 명예, 재력을 따라 열심히 공덕(?)을 쌓지만 주님께서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쌓은 선행은 자신에게 되돌아오지만 작은이들에게 베푼 선은 하느님 손 안에 남아 있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6,3-4) 그리스도인의 선행에는 전제 조건이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사랑으로 ‘행했는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는가?’만 있을 뿐입니다.

그 어느 날,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오늘의 내 삶을 펼쳐봅니다. 매 순간순간 나의 삶은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지요? 내가 지향하는 가치는 하늘의 것인지, 땅의 것인지요? 나는 작음, 평범함, 부족함을 ‘있음’ 그대로 수용하며 나의 이웃과 함께 기쁨과 평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인가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는 말씀을 마음에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사랑의 송가(1코린 13장)를 나지막이 읊조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