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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봉헌 100주년의 해(1918~2018)
한국천주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성모순례지
- 성모당


글 이찬우 타대오 신부 | 교구 사료실 담당 겸 관덕정순교기념관장

 

어릴 때를 추억하면 많은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특히 친구와 싸웠을 때, 서러운 일을 당했을 때, 학교에 갔다가 파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우리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엄마’라는 말입니다. 세월이 지나 나이가 점점 들어감에도 우리에게 ‘어머니’란 단어는 항상 머리에 남고,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어머니’처럼 대구대목구 초창기에도 ‘어머니’를 필요로 했고, 그 장소가 성모당인 것 같습니다. 성모당은 성모순례지입니다. 『교회법』에서는 순례지를 ‘신자들이 특별한 신심때문에 순례하는 성당이나 거룩한 장소’(제1230조)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대구대교구에 있는 성모당은 한국천주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성모순례지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에는 성모순례지가 세 군데 존재합니다. 성모당, 남양성모성지, 매괴성모성지입니다. 남양성모성지는 1991년에, 매괴성모성지는 2006년에 각 교구에서 성모성지로 선포하였습니다. 그에 비해 성모당은 1918년 봉헌식과 더불어 대구대교구의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 주교에 의해 기도의 장소이자 신자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로 선포됩니다. 성모성지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았으나, 요즘으로 말한다면 성모성지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성모당의 시작은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1831년 설립된 조선대목구는 80년이 지난 1911년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됩니다. 그러면서 대구대목구장을 선출합니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은 경상도지역에서 오랫동안 사목경험을 한 계산성당 주임인 로베르 신부, 아니면 연장자 서열 3위이자 계산성당의 설계와 건축을 맡았던 프와넬 신부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선출된 사람은 35세에 불과했던 드망즈 신부였습니다. 아마도 새로 생겨나는 교구에서는 할 일이 많을 테고, 그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연륜과 경험보다는 젊음과 패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1911년 4월 23일 주일, 드망즈 신부는 자신이 일하던 경향신문사에서 오전부터 사진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을 하고 있던 와중에 뮈텔 주교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뮈텔 주교는 드망즈 신부에게 “주교님이 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하고는 깊은 포옹과 전보를 보여줍니다. 드망즈 신부가 새로운 교구,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담당할 남방교구, 곧 대구대목구의 교구장이 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드망즈 주교는 1911년 6월 1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주교품을 받습니다. 그리고 6월 26일 월요일 서울을 출발해 대구에 도착합니다. 아마도 대구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고민할 법도 한데, 일주일 동안 교회법상 임명해야 하는 부주교(현재의 총대리)의 임명 이외에는 다른 일정을 잡지 않습니다. 그 일주일 동안 깊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신생 교구의 터전을 잡을 수 있을지 말입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7월 2일 대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주일에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립니다. 그 자리에서 드망즈 주교는 루르드의 성모님을 대구대목구의 보호자로 청하면서 허원을 합니다.

드망즈 주교가 한 허원(許願)은 교구청사 건립, 신학교 설립, 주교좌 계산성당의 증축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드망즈 주교가 대구에 부임할 때, 서울대목구의 뮈텔 주교는 ‘나눠줄 것이 없으니 가난이나 나누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뮈텔 주교의 이 말은 당시 대구대목구의 사정을 말한 것입니다. 신생교구인 대구대목구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기금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드망즈 주교는 어린이가 ‘어머니’에게 떼를 쓰듯이 성모님께 떼를 썼습니다. ‘도저히 제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어머니께서 알아서 해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드망즈 주교가 허원한 지 3년째가 되던 해에 주교관이 완공되고, 4년째 되던 해에는 신학교가 설립됩니다. 그리고 8년째 되던 해에는 소세 신부의 치유와 더불어 주교좌성당의 증축이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드망즈 주교는 성모당을 짓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 성모당을 짓기 전에 이루어진 세 가지 사업이 쉽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 가지 사업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드망즈 주교의 기록을 보면, 1년에 거의 2천 5백여 통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교구청사가 건립되고 신학교가 지어질 때쯤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외국에서 오는 원조금이 거의 십분의 일로 줄었습니다. 교황청에서도, 파리외방전교회에서도 대구대목구를 돕기 위한 기금을 보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또한 신생 교구인 대구대목구의 사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신부들 중의 몇몇은 유럽전선의 군대에 차출되어야 했습니다. 이 와중에 드망즈 주교는 외국에 있는 은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도움을 달라.’고 편지를 보내고, ‘도움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성모님의 간구 안에서 드망즈 주교 역시 자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