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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다시 읽기
창조 이야기, 나의 역사


글 강수원 베드로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전통적으로 성경은 천지 창조부터 종말에 있을 세상의 완성에 이르는 이야기를 담은 하나의 ‘역사책’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오랜 세월 누구 하나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의 첫 대목인 ‘창조 이야기’부터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거, 실화냐?”, “고대 근동 창조 신화들하고 너무 비슷한데, 베낀 거 아냐?”

 

창조 이야기, 글자 그대로의 사실?

성경에는 많은 역사(history)와 이야기(story)들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도 있고, 성경 저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담아 기록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것을 엄밀하게 구분하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천지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역사’라고 칭할 수 없습니다. 역사란 기본적으로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이나 기록 또는 명백한 고고학적 자료에 기반한 것인데, 하느님의 창조를 옆에서 누군가 직접 보고 기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실 창조 이야기는 성경의 저자들이 선조들에게서 전해 받은 지식과 깊은 신앙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창조 이야기를 사람이 지어낸 전설이나 소설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이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분명하게 계시하셨고(“바로 내가 땅을 만들었고 그 위에 있는 인간을 창조하였다. 바로 이 내 손으로 하늘을 펼쳤고 그 모든 군대에게 명령을 내린다.”: 이사 45,12) 성경의 저자들은 그 계시 진리를 올바로 전해주기 위해 창조 이야기를 작성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1~3장을 창조 역사(歷史)라기보다 창조 설화(說話)라고, 이를 기록한 이들을 작가(作家)라 하지 않고 저자(著者)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 고대 근동의 신화들을 베낀 것?

시공 안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진리를 글로 담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담아내기 위한 일종의 그릇으로서 문학적 틀을 갖춘 ‘이야기’ 형식을 사용했습니다. 사실 창조 이야기의 저자들이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들의 내용과 형식을 차용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정치, 문화적으로 훨씬 앞서 있던 이웃 나라들의 양질의 문학적 기교를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그 안에 이스라엘의 고유한 신앙을 풍성히 담아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창조된 수많은 신들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느님’을 말하고, 신들의 생계를 위한 부역자가 아닌 ‘하느님의 동반자인 인간’을 말하고, 이방 민족들이 신들로 섬겼던 ‘천체들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선포함으로써, 창세기의 저자들은 오히려 창조주 하느님의 절대적 우위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창조 이야기가 담고 있는 구원의 진리

얼마 전 한 공직 후보자가 “지구의 나이는 6,000년이라고 신앙적으로 믿는다.”라고 대답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6,000년은 성경 인물들의 나이를 반영하여 계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창조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fact)이 아닌 구원의 진리(truth)를 담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자구적인 표현들 하나하나를 사실로 지나치게 고집하거나 단편적인 의문들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줄 다 아셨을 텐데, 왜 그런 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셨지? 처음부터 시험할 생각이셨나?’, ‘선악과를 따 먹으면 그날로 죽는다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안 죽었잖아. 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셨지?’ 사실 이런 생각들은 창세기 저자의 관심도 아니었고, 그가 애써 담아내고자 했던 진리와도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꼭 간직해야 할 ‘사실’이요 신앙의 ‘진리’는 따로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은 창조주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무(無)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셨고, 인간이 감히 다 헤아릴 길 없는 오묘한 섭리로 나와 온 세상을 충만한 구원으로 이끌어 가고 계신다는 확고한 진리입니다.

둘째, 인간은 흙으로 창조된 유한한 존재이지만(2,7ㄱ)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어(1,26) 그분의 생명의 숨을 나누어 받은(2,7ㄴ) 유일하고 가장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을 올바로 관리하고 하느님의 나라로 완성해 가야 할 사명(1,28; 2,15)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인 동시에 의무입니다.

셋째, 인류 역사의 시초에 원조들은 자유를 남용하여 하느님의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아담(히브리어 “아다마”[“흙”])과 하와(“하봐”[“생명”])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서 흙으로 빚어 생명을 불어넣으신 존재’, 즉 모든 인간 존재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먼 옛날 원조들만의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금 내게 들려주시는 ‘나의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 앞에서 누렸던 복락도, 그분의 사랑을 저버리고 배신했던 모습도, 사실 그 모두가 나의 하루 안에서 반복되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순간 내 앞에는 선과 악의 열매가 놓여있고 나는 선택을 합니다. 그 선택에 따라 하느님을 닮은 거룩하고 고귀한 자(1,26)로 기쁨 속에 살기도 하고, 죄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난 알몸으로 하느님에게서 숨기도(2,7-8) 합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하시며 나를 찾아 부르십니다. 그렇게 창조 이야기는 매일 ‘나의 역사’, ‘나의 이야기’가 됩니다.

 

창조 이야기는 추방 이야기가 아닌 축복과 희망의 복음!

원조들의 범죄가 가져온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혹독한 노동과 고통, 죽음의 세력에 짓눌리게 되었고(3,16-19) 결국엔 하느님과 생명의 친교를 누리던 낙원에서 내쳐졌습니다.(3,23-24) 그러나 창조 이야기는 원조들의 추방으로 끝나는 비극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은 죄를 짓고 숨어있던 그들을 먼저 찾아 나서는 분이시고(3,9) ‘선악과를 따먹는 날 반드시 죽으리라’(2,17) 하셨지만 오히려 가죽 옷을 만들어 죄와 수치심을 오롯이 덮어주는(3,21)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창세기 저자가 전하는 이런 하느님의 모습은 그저 지어낸 ‘미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 그분께서 동일한 하느님의 모습을 증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 모든 것을 탕진했던 아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던’(루가 15장) 바로 그 아버지의 모습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커룹들과 불 칼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는 것은(3,24)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났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마련하셨던 낙원과 생명나무를 안전하게 잘 지켜 두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나라,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그 길을 다시 열어주신 분이 바로 ‘새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한 인간의 결정적인 승리를 약속하신 하느님의 말씀(3,15)을 원(原)복음이라 부릅니다. 그렇게 세상의 창조와 인간의 운명에 관한 창조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구원의 약속, ‘복음’이 됩니다. 창조 이야기는 나를 축복과 희망의 삶으로 매일 새롭게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초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