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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봉헌 100주년의 해(1918~2018)
대구대교구(대구대목구) 설립 25주년 기념식


글 이찬우 타대오 신부 | 교구 사료실 담당 겸 관덕정순교기념관장

 

벌써 녹음이 짙어지는 6월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워지는 여름입니다. 여름이 되면, 성모당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순례객도, 기도하러 오시는 분들도 줄어듭니다.

5월 성모 성월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모당에 기도하러 모였는데, 이상하게도 예수 성심 성월인 6월이 되면 성모당에 기도하러 오시는 분들이 줄어듭니다. 아마도 점점 뜨거워지는 여름 더위에 지쳐서일 겁니다.

1936년 6월 11일 여름의 초입에 대구대목구(교계제도가 설정되기 이전의 단계를 말하며, 편의상 이하 대구교구로 칭한다.) 설정 25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6월 11일은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주교서품식이 있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드망즈 주교는 교구 설정 25주년 기념식을 성모당과 계산성당에서 열었습니다. 아마도 주교좌 성당인 계산성당에서 시작행렬을 하고, 교구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도와주신 성모님께 감사하고 싶어서 마침행렬을 성모당에서 하려고 계획한 것 같습니다.

대구교구가 설정되기 한 해 전 1910년 3월 한국천주교회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 소문은 ‘남방에 교구가 하나 설정되는데, 그 본부가 대구가 될지, 전주가 될지 알 수 없다. 다만 전주가 더 유력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주는 한국에서 초대부터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신자수도 대구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경상도의 대구 역시 경부선이 지난다는 점과 병인박해 기간에 비교적 박해가 약했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는 신자가 많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선교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교통이 불편한 전주보다는 대구에 교구의 본부를 두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대구에 교구본부가 오게 되었고, 초대 교구장으로 드망즈 주교가 부임했습니다. 드망즈 주교가 처음 대구에 올 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드망즈 주교는 그것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해나갔습니다. 그것은 교구청, 신학교 건립 같은 외적인 건축물의 완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구의 기틀을 놓는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학교, 병원, 사목지침서, 회장제도 개선, 그리고 그보다 더 머리 아픈 일들이 늘 드망즈 주교를 괴롭혔습니다. 그렇게 하길 25년, 정말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일 년에 몇 달씩 사목방문을 나가야 했고, 문서작업과 서류작업을 했으며,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은인들에게 편지를 써야만 했습니다.

불과 36세에 교구장이 되었던 드망즈 주교의 풍성했던 머리카락은 25년이 지나 다 빠져버렸고, 까맣던 수염은 새하얗게 변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며 25년이 지났습니다. 25년을 즈음하여 드망즈 주교는 자신이 달려온 길을 되돌아 볼 시간을 가졌고, 대구교구 25주년 기념식을 열겠다고 신자들에게 알렸습니다.

교통도 불편한 그 당시에 대구교구 설정 25주년 행사에는 4만여 명의 교구 신자 중에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모두들 주교좌 계산성당에 모였고, 그곳을 출발하여 달서교(현재의 달서교가 아니라 달서천을 가로지른 달서교로 ‘서다리 목걸’이라고 불리웠다. 현재는 복개되어 도로가 되어있다.)를 거쳐 성모당에 이르기까지 온갖 깃발을 들고 행렬을 하면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청에서는 드망즈 주교에게 ‘교황 탑전 시종직’에 임명한다는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아마도 드망즈 주교가 대구교구를 위해 오랜 기간 동안 고생한 것을 표창하고자 한 것이었을 겁니다. 드망즈 주교는 “사람들은 비슷한 경우에 있어서 모든 병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지휘관에게 훈장을 수여합니다.”라며 많은 사람들의 참석과 축하에 감사로 답했습니다.

드망즈 주교는 자신이 받은 공로에 대한 감사가 자신의 것이 아니고, 오히려 대구교구의 모든 신자들이 받아야 할 몫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25주년을 기념하는 이 행사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대구교구의 모든 신자들이고, 자신은 단지 신자들을 대표하고 대신하여 축하를 받는 것이라며 대구교구의 모든 신자들의 희생과 기도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교구 25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주교좌 계산성당 앞에 화강암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십자가는 조금씩 부식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십자가로 교체되었습니다. 원래 있던 십자가는 복원작업을 거쳐 2000년 12월 지금의 복자성당 마당 순교자 묘역 안에 세워졌습니다.

 

교구 설정 25주년 기념식이 있던 6월부터 성모당은 조금씩 조용해지는 시기입니다. 찾아오는 신자들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6월에도 신자들이 많이 모이는 날이 있습니다. 6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입니다. 신기하게도 6월 29일 전후의 월요일이 되면 성모당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미사에 참여합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몰랐습니다. 그냥 예수 성심 성월의 마지막 날을 성모당에서 보내고 싶어서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왜 그런지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보다 더 많은 미사지향과 그 지향 안에 사제들의 이름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6월 29일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대구대교구에서는 많은 신부님들이 이때쯤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이때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부님들의 서품축일이 이날입니다. 그래서 6월 마지막 월요일이 되면 많은 신자분들이 성모당에 오시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각자 존경하는 신부님들을 위해 미사지향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번 6월은 대구대교구를 위해서, 그리고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6월이 되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