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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다시 읽기
박수칠 때 떠나다, 모세(2)


글 강수원 베드로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경학 교수

 

주님의 종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신명 34,5-7 참조)

 

광야 여정, 하느님의 현존

이집트 제19왕조(기원전 1295~1186년)의 파라오 세티 2세 때에 작성된 한 문서(Papyrus Anastasi V)는 이집트에서 도주한 두 노예를 뒤쫓던 관리 이야기를 전합니다. 물론 이들을 모세와 아론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탈출 경로(라메세스-수콧-믹돌)가 탈출기와 민수기가 전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동 경로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에 학자들은 큰 흥미를 느꼈습니다. 성경의 증언에 충실하자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로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을 낮에는 구름기둥 속에서,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직접 인도하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생존의 위협과 척박한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도우심은 더욱 빛을 발했고, 그렇게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 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가장 소중한 ‘구원의 기억’을 갖게 되었습니다.

 

갈대 바다의 승리, 하느님을 알게 됨

이집트 탈출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갈라진 바다 한가운데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갔던 장엄한 ‘모세의 기적’ 이야기(탈출 14장)일 겁니다. 이 사건은 이집트에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던 일(12장) 이후, 또 한 번의 결정적인 ‘건너감’(파스카[!])이었습니다. 혹여나 이 사건을 그저 ‘조수 간만의 차’나 ‘얕은 늪지대를 통과했던 일’로만 설명하곤 그것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이해라 여긴다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저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던 음식들을 내놓고 나누도록 설득하셨던 하나의 ‘미담’(?)으로 의미를 축소해 버리듯 말입니다.

그러나 갈대 바다 사건은 분명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내신 구약 시대 최고의 구원 사건이요, 결정적 신앙 체험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은 살고 이집트인들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결론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그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알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야다”는 흔히 관계나 체험을 통해 얻는 깨달음을 가리키는데, 탈출 1~14장에서만 무려 23회나 사용됩니다. 그렇게 탈출기 저자는 종살이에 익숙해져 하느님을 잊어가던 이스라엘과 그분을 전혀 몰랐던 이집트인들, 그들 모두가 ‘진정한 신은 오직 야훼 하느님뿐’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되었음을 힘주어 증언합니다.(6.7; 7,5; 10,2; 14,4.18) 일상 속에서 주어지는 소소한, 아니 어쩌면 결코 작지 않은 하느님 도우심의 기적들을 우리가 매순간 인지하고 감사드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을 알아가는 길’, 가장 확실한 우리 ‘구원 체험’이 될 것입니다.

 

광야의 여정, 불평, 견책과 구원

탈출기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전체 이야기는 하나의 완벽한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뵙고 그분의 백성으로 태어난 시나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바로 두 ‘광야 여정’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 번의 광야 여정 중에 겪었던 시련들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배고픔과 갈증(탈출 15,22-27; 16,1-36; 17,1-7; 민수 11,1-35), 공동체 내 권위에 대한 갈등과 마찰(민수 12,1-16; 16,1-35), 이민족의 공격(탈출 17,8-16)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광야 여정은 철저히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물론 ‘척박한 광야에서 고생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며 매일 불만을 쏟아내던 노예근성이 갑자기 어디 가겠어?’ 인간적으로 이해도 해보지만 그들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기 시작한 것이 갈대 바다의 구원 사건 이후 고작 사흘이 지났을 때(탈출 15,22)라는 사실에 기가 막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 역시도, 하느님을 곁에 모시고 살면서도 매일 불만을 쏟아내는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질 때면 문득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께 불평할 때 엎드려 그분께 간청했던 기도의 사람(탈출 15,25; 17,4.9; 민수 11,2.11-15; 12,13; 16,4; 20,6 참조), 모세입니다. 광야 여정 중에 모세의 겸손한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가져왔고 죄 많은 백성을 광야에서 지켜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외침이 기본적인 ‘생존’과 연관된 것일 때에는(제1광야 여정 중) 그것이 설령 불평과 한탄일지라도 한결같이 구원으로 응답하셨지만 그 외에 더해진 탐욕과 갈망 때문일 때에는(제2광야 여정 중) 견책과 훈계를 위한 벌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라도(탈출 16장; 민수 11장), 마싸와 므리바의 물 이야기라도(탈출 17,1-7; 민수 20,2-13) 그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러한 사실은 처음에는 하느님을 몰랐다 해도,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백성이 된 시나이 사건(탈출 19-24장)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역시 달라져야 했음을 말해줍니다. 분명 하느님은 우리의 부르짖음, 공허하고 서툰 탄식에조차 기꺼이 귀기울여주시는 분이시지만(탈출 2,23 참조) 하느님의 백성, 그분의 자녀가 된 사람은 더 이상 매사에 불평만 해서는 안 됩니다. 불평불만을 습관처럼 입에 달고 살고, 의식 없이 빈말을, 또는 아예 상처가 되라고 형제에게 독한 말을 내뱉는 것에 익숙해진 이에게는 감사한 일상도 척박하고 힘든 광야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박수칠 때 떠나다, 모세

구약의 전승들은 모세의 겸손함(민수 12,3), 충실함과 온유함(집회 45,4)을 하나같이 칭송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경의 마지막에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12 참조)라는 최고의 찬사까지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40년간 광야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마지막까지 인도해낸 후에 모세가 맞이하게 된 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축복이 아니라 그 행복을 뻔히 눈앞에 두고도 광야에서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었습니다.(“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신명 34,4) 성경 저자는 그토록 거룩했던 하느님의 사람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지 못했던 이유를 두 가지 일로 설명합니다. 가나안 땅 정찰 후에 하느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저버렸던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하지 못한 탓(민수 14,28-35; 신명 1,37)과 므리바에서 하느님의 말씀 그대로 실행하여 그분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탓(민수 20,12)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단순히 모세가 자기 죄 때문에 죽었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생을 마쳤다는 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과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신명 34,7)는 구절에 좀 더 머물러보고 싶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기를 잃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생기를 잃고 죽을 때가 아니었는데도,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 품으로 떠났다.’는 말로 들려옵니다. 결승선을 눈앞에 두고서 손만 내밀면 닿을 듯한 곳에 평생 동안 그토록 찾았던 목표가 있는데도, 모세는 그것을 하느님께 청하지 않았습니다. 가지려 고집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이라면 즉시 내려놓고 그분께 모든 걸 맡겨드린 채 떠나는 믿음으로 응답했습니다. 안락한 삶과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이집트의 왕궁을 떠났던 그 모습 그대로, 이제 평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그 축복의 땅을 눈앞에 두고도 하느님께 생명을 돌려드리기까지 오롯이 순명했습니다. 정말 이런 믿음을 우리도 가질 수 있다면,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하느님 안에 자유로울까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짝사랑과 도우심을 가슴깊이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의 시절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생활은 안정되고 몸은 편해졌지만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더 멀어져갔던 그들이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지친 나의 하루가 헛된 고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향한 ‘단련과 성장의 광야’임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다면, 바로 그때 내 곁에서 오늘도 나를 지키며 함께 걷고 계신 광야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