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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성모당의 나무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교구청에 근무하면 좋은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가까이에 성모 당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성모당을 지나 출근하고, 식사 후에 성모당 안을 거닐며 산책할 수 있습니다. 성모 성지와 성직자 묘지 도 있고, 무엇보다 울창한 숲을 이룰 만큼 나무가 많아 산책하기에 좋습니다. 도심 한가운데 이런 공간을 만나기가 쉽지는 않지요. 그래서 저는 인적이 드문 조용한 아침 새로 단장한 인도를 따라 산책하는 것을 특히 좋아합니다. 성모당 일대에는 느티나무, 벚나무, 소나무와 이름도 모르는 많은 나무가 있습니다. 성모당의 역사와 함께해 온 나무들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깁니다.

나무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오면 새잎이 나면서 성모당 전체가 연노랗게 물듭니다. 봄을 알리는 매화, 목련, 개나리, 벚꽃들이 피면 성모당은 화려함이 절 정에 달합니다. 여름이 오면 이파리들은 신록이 우거져 뜨거운 햇빛을 가려 주지요. 가을에는 낙엽이 져 성모당은 또 다른 아름다움 을 선사합니다. 위령 성월이 다가올 즈음에는 차가운 바람에 낙엽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죽음을 묵상하게 합니다. 하지만 다시 봄이 찾아오고 생명이 새로 시작되리라는 것을 나무는 깨우쳐 주지요. 나무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변화 덕분에 성모당은 생동감을 얻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듯합니다.

하지만 나무의 잎과 꽃, 열매, 가지, 낙엽은 지엽(枝葉)적인 것으로 말단(末)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은 나무의 화려한 겉모습입니다. 나무의 근본(本)은 글자 그대로 뿌리입니다. 나무의 뿌리는 땅속에 묻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 나무를 지탱하는 힘과 수분, 영양분은 뿌리를 통해 공급됩니다. 뿌리가 건강해야만 나무는 꽃을 피울 수 있고 가지를 뻗어 잎을 만들어 광합성을 하 고 열매를 맺습니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 낼 수 있는 것도 뿌리의 힘이지요. 그러니 근본을 중시하고 바로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대학(大學)』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만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다.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말단 이 잘 다스려지는 경우는 없다.”1)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다 보이지 않는 근본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는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이 있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근본을 바로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근본이 튼튼하고 안정되어 있다면 지엽적인 것들의 변화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근본을 등한시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말단만 꾸미고 치장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근본(本)은 무엇인가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를 지탱해 주고 나를 살게 하는, 나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 나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 그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런 것들이 나를 지탱하는 근본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근본은 소홀히 한 채 내가 맡은 일, 강론, 글, 외모에만 신경쓰며 산 것은 아닌지 성찰하고 반성해 봅니다.

오늘도 성모당을 산책합니다. 신록의 나무들이 손짓하며 제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습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1-42

 

1) 대학(大學)경문 1. “物有本末.其本亂而末治者, 否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