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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현장에서
내후년이면 계획대로 기관 문을 닫을 수 있을 겁니다.


글 도건창 세례자요한 | 꽃동네대학교 상담심리대학원 카리타스학과 조교수

 

내후년이면 계획대로 기관 문을 닫을 수 있을 겁니다. 

1999년 온천도시로 유명한 바덴바덴시의 한 기관을 방문했다. 그 기관은 과거 프랑스군이 주둔했던 병영에 조성된 임대주택 단지에 있었다. 단지 내 주민들의 출신 나라가 40여 개에 이르고, 언어와 문화도 다양했다. 그런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한 동네에 살게 된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 이해해가며 더불어 살고 마을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카리타스지역사회사업센터가 설치되었다. 지하실에서 탁구를 치거나 밴드를 연습하는 청소년들, 자녀 양육에 관해 함께 의논하는 30~40대 여성들, 마을축제 준비회의를 하는 주민대표들 등 각자 자신이 하고 싶거나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기관장은 5년 안에 주민들 스스로 센터를 운영하게 하는 것이 이 기관의 목표라고 했다. 그에게 지난 3년 반 동안 목표치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물었다. 그는 70~80% 정도 달성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1년 반 뒤에는 주민들 스스로 지역사회사업센터를 운영하게 될지 물었다. 그는 주민공동체가 현재처럼 발전해 간다면 내후년에는 주민들 스스로 센터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면 기관 직원들은 바덴바덴시 카리타스협회에서 운영하는 다른 시설이나 기관으로 옮기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오, 우리는 5년짜리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채용되었기에 이동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잠깐 당황했다. 그 프로젝트의 성공이 직원들에게는 실직을 뜻했기 때문이다. 다시 물었다. “그러면 관장님과 동료들은 일자리를 잃게 됩니까? 그래도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습니까?” 그 기관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채용될 때부터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고 참여 확대와 역량강화로 주민들 스스로 지역사회사업센터를 운영하는 것을 목표로 일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그 자체로 우리에게 훌륭한 경력이 되기 때문에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민들이 이루어 온 것을 함께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당연한 모범답안이었다. 거의 모든 사회복지시설·기관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자신이 필요 없어진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황한 것은 내가 그것을 실제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주민들이 함께 기뻐하는 평가를 받고 싶어요!

그와 나눈 이야기를 생각하다 작년에 종합사회복지관에서 근무하는 동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 우리는 “선생님께서 해야 할 일 가운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거나 고민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나누기를 했다. 그 동료는 “주민들도 함께 기뻐하는 평가를 받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한 말의 핵심은 “주민(당사자)”과 “평가”다. 원칙대로라면 이 두 단어는 모두 한 가지 목표를 가리키고 있다. 주민(당사자)이 원하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업목표고, 평가는 그 목표를 얼마나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달성했는지를 가늠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동료는 왜 그것을 고민처럼 말했을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당사자의 현실과 필요만으로 사업목표를 세우기 힘든 현실때문이다. 당사자와 그를 매일 만나는 현장 사회복지사보다 사회복지예산을 편성하는 정치인, 그 예산을 집행하는 상급기관이 사업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정하는데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공공복지 예산뿐만 아니라 민간사회복지기금도 해야 할 사업과 그 목표를 규정해서 제안하고 그 일을 대신 수행할 기관을 찾는 경우가 잦다. 사회복지 현장에서는 그 돈을 받기 위해 당사자 한 사람 한 사람의 현실적 필요에서 출발해 사업을 기획하지 못하고 돈을 지원해준다는 사업 성격에 맞는 사람들을 찾아서 사업을 만드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러다보니 평가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만큼 해냈다는 것을 입증하는 서류를 준비해야 하는 작업이 되어 당사자 삶의 질 전체와 별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당연히 평가는 사회복지종사자의 일이 되고, 당사자는 평가결과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런 일은 사회복지 서비스를 이용하는 당사자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 조직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교육을 다니다보면 기관장이나 상급자가 교육장소 배치, 간식 준비, 교육진행자 섭외와 배웅까지 직접 챙기거나 세부사항까지 지시하고 담당자는 그것을 실행만 하는 경우를 본다. 그런 조직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의 얼굴은 대체로 어둡고 토의를 해도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거나 건성으로 이야기한다. 그들에게는 자기 일이 없고 그들의 제안사항은 대개 근무하는 사람들의 근로 조건이나 복리후생에 관한 것이다. 그 조직 안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결국 당사자는 물론 당사자와 함께 그 사업을 직접 수행하는 사람, 그 기관까지 자신의 일에서 소외되어 불행해진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대신해주는 것은 불의이고 중대한 해악이며 올바른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가톨릭사회교리는 이런 위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회라는 건물을 짓기 위해 보조성(Subsidiarity)을 원리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1931년에 반포된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사십 주년』 79항은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될 수 있는 것을 개인에게서 빼앗아 사회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은 확고부동한 사회철학의 근본원리”라며 “더 작은 하위의 조직체가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더 큰 상위의 집단으로 옮기는 것은 중대한 해악이며 올바른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활동은 본질적으로 사회 구성체의 성원을 돕는 것”으로 사회구성원들을 파괴하거나 흡수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원리에 근거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가톨릭교회를 비롯해 고통 받는 이웃에게 봉사하면서 사회 전체에 사랑의 문명을 이루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국가”가 아니라 “보조성의 원칙에 따라 다양한 사회 세력의 활동을 관대하게 인정하고 지원하는 국가”(『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8항 나)가 필요하다고 했다.

보조성 원리는 가톨릭사회교리가 주장하는 이상이 아니라 여러 나라 법률에 실제로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독일 사회 법전 Ⅲ권은 “민간 청소년복지에서 인정받은 운영주체가 적절한 시설·기관과 행사를 운영하거나 적기(適期)에 설치할 수 있는 한 공공 청소년복지는 자기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독일 사회법전 Ⅷ권 4조 2항)고 명시하고 있다. 나아가 동일하게 적절한 정책에서 당사자 관심사를 더 강하게 지향하는 정책에 우선권을 주고, 그 정책이 정책 구성에 영향을 미치도록 보장하게 되어 있다.(독일 사회법전 Ⅷ권 74조 4항 참조) 국제 가톨릭 사회복지협의체인 국제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 역시 자신들 활동 원칙의 하나로 보조성을 들고 있다.(『국제카리타스윤리강령』 원칙 2. 보조성) 그래서 가능한 한 해결해야 할 문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당사자, 실무자나 실무조직의 권한, 결정과 책임을 위임함으로써 그들의 역량과 활용 가능한 자원을 극대화시키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되 필요한 만큼, 필요한 동안만 도와줌으로써 그들이 점점 더 큰 자율성과 책임을 맡을 수 있게 역량을 강화하고 증진시키는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 가르침의 기본 확신은 사회 속에서, 사회를 통해 자기 자 신을 형성해가는 인간이 존엄하고 대체불가능하며 유일무이한 존재답게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복지교육을 하는 나는 어떻게 일하고 있는가? 교육 참석자들이 스스로 학습하고 판단하며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늘리는가, 아니면 줄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