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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사목을 하며
대세자 라파엘


글 김남수 안젤라 | 수성성당, 경북대학교병원 원목봉사자

 

그에게도 혈기 왕성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병마가 그의 몸을 덮쳐 건강을 앗아가버렸을 때 발버둥치며 세상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리라. 인생의 절정인 젊음의 20대, 꿈을 펼칠 사이도 없이 병마와 싸워야 하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인생의 달콤함은 맛보지도 못한 채 쓰디쓴 약만 먹어야 했다. 끈기와 인내로 병마와 투쟁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새엄마 밑에 둘만 남겨진 남매는 비빌 언덕조차 없어 마음이 늘 허전했을 것이다. 외로움과 그리움에 떠밀리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뇌종양을 앓았는데 그것이 빌미가 된듯하다.

말문을 닫은 채 누워 있는 그와 만난 것은 기도 봉사를 갔던 병실에서였다. 무슨 인연이었는지 몰라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내 가슴에 각인이 되었다. 스물넷의 나이가 너무 아까웠다.

간병사 세실리아의 권유로 신부님께 대세를 받고 ‘라파엘’이란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가슴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성모님의 품에 안겼다.

수산나 자매님과 내가 찾아가면 늘 힘없이 누워있던 그는 손을 내밀어 반겼다. 기도가 끝나면 고맙다는 인사로 내 손등을 간질이기도 하고 때론 하이파이브를 하자며 손을 번쩍 들어 마주치기도 했다. 또 고맙다는 뜻으로 손으로 OK를 하며 잔잔한 미소로 답할 때 우리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수녀님이 그의 초상화를 그려 주니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손을 내밀어 우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은 차갑고 힘이 없었다. 웃음을 잃은 지 오래된 그의 얼굴엔 쓸쓸함이 배어있어 더욱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다.

하느님의 자비로 그가 세상 속으로 돌아와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그를 위해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통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청년 라파엘의 삶에 대한 희망이 스러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말문이 닫혀버린 그는 오직 눈과 손으로만 의사 표시를 할 수 있었다. 간병사 세실리아와 그는 요구하는 것을 번호로 약속해서 눈빛으로 서로 소통한다고 했다. ‘살고 싶다’는 애절한 그의 눈빛은 세실리아의 가슴에 자상을 내는 듯한 아픔이었다고 했다.

그는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늘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청년 라파엘이 너무 측은해 연민을 느꼈다. 소박하고 평범한 삶을 그렸던 그에게 작은 등불이 되어 어둡기만 한 그의 마음에 빛이 되고 싶었다.

십수 년을 기도 봉사하면서 절망의 늪에 있는 환우들에게 아무런 보탬도 힘도 어떤 해결책도 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깝고 원망스러웠다.

의료보험 문제로 3차 병원에서 오래 머물 수 없어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만 하는 그 ‘법’이란 것이 꺼져가는 생명줄에 자그마한 위무와 행복마저 앗아가버려 그도 나도 무척 원망스러웠다. 다른 병원으로 가기 싫어 발버둥을 쳐봤지만 힘없는 그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다른 곳으로 옮긴 지 열흘 만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버렸다. 그의 명줄을 재촉한 그 법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혜택을 준다는 말인가.

헌신적인 간병사 세실리아의 도움이 그를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덕분에 그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행운이었다. 비록 대세를 받은 신자였지만 세실리아를 통해 하느님의 따스한 사랑을 알았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믿었기에 그 품에 안길 수 있었으리라.

고통과 시련, 절망이 없는 피안, 그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