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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봉헌 100주년의 해(1918~2018)
성모당 이야기


글 이찬우 타대오 신부 | 교구 사료실 담당 겸 관덕정순교기념관장

 2018년 10월 13일은 성모당 봉헌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년 동안 성모당 봉헌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월 성모 신심을 시작으로 11월 성직자 묘지에 대한 이야기까지 참 많은 글을 적었습니다.

지난 10월 성모당 봉헌 100주년 때였습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성모당에 모여 100주년 봉헌식과 기념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저 또한 함께했고 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교구와 벨포르-몽벨리아교구에서 오신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이 함께 하셨습니다. 이 두 교구는 대구대교구의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님과 대구본당(현재의 주교좌 계산성당)의 초대 주임신부인 로베르 신부님의 출신 교구입니다.

 

성모당 봉헌 100주년 기념 미사 때 주교님의 말씀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말이 있습니다. 벨포르-몽벨리아교구의 교구장이신 도미닉 블렁쉐 주교님의 말씀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주고 난 뒤에 하늘로 돌아갑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도 하느님에게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하느님의 뜻하는 바를 이룬 뒤에, 하느님의 사명을 완수하고 난 뒤에 돌아갑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55장 10~11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아마도 로베르 신부님의 활동을 염두에 두신 말씀 같습니다. 또 기억에 남는 건 스트라스부르 대교구장인 뤽 라벨 대주교님입니다. 이분은 제가 소임으로 있는 관덕정순교기념관에 두 번 방문하셨습니다. 첫 번째 방문은 계획된 방문이었고, 두 번째 방문은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휴식시간에 조용히 온 방문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두 번이나 오실까?’ 궁금했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머나먼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순교자가 우리와 사뭇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울고 웃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한국천주교회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강해집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순교자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들의 영웅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물론 순교자들에게 영웅적인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은 끊임없이 절망하고 포기하고 때로는 하느님을 원망하고 싶어지는 유혹을 겪으면서도 끝없이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고 싶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관덕정순교기념관을 두 번이나 찾으셨던 것 같습니다. 순교자들의 삶의 끝자락에 함께한 장소, 그리고 그들이 사용했던 물품이 있고 그들이 고민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당 봉헌 100주년 이야기를 하면서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베르 신부님 이야기입니 다 . 어쩌면 로베르 신부님은 성모당 봉헌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인물입니다. 대구본당 곧 계산본당과 관련이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벨포르-몽벨리아 교구장님의 말씀처럼 대구에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자랄 수 있게 했던 첫 번째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인물입니다. 로베르 신부님이 대구에 오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로베르 신부님의 서한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경상도의 신자들은 대체로 믿음과 신앙심이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선교사를 접해본 적이 별로 없는 이들은 우리 성교회의 진리에 대해 매우 무지한 편입니다. 그러나 예비신자들은 제법 많습니다. 외교인들은 복음을 듣자마자 즉시 친지와 이웃들에게 전합니다. 간혹 이들이 곤경에 처하는 경우도 생기겠지만 자기의 신앙에 대해 굳건한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도저히 자기의 신앙을 고수하기 어려워질 때는 이사를 가서 다른 공소에 정착할 것입니다.

경상도 신자들의 무지를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면 실제적인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것은 도의 중심지에, 말하자면 대구시에 선교사를 한 명 배치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가르침을 받고 싶어도 선생이 없어서 그럴 수 없는 신자들 안에 선교사가 존재함으로써 얻게 될 수확을 생각한다면 비용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대구시에는 1~2년 전부터 일기 시작한 신자들의 열정을 촉진시켜 주며 그들의 열정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일을 맡을 선교사 한 명을 두어야 할 만큼 충분히 많은 신자들이 있습니다.… 주교님께서도 잘 아시고 계시듯이 경상도 신자들은 자기들이 버림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 일 년에 한 번 선교사가 그들을 방문하여 살펴보고는 여름을 보내기 위해 상당히 먼 곳으로 떠나기 때문에 신자들이 조언이나 권고가 필요할 때에도 의논할 대상이 없으니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1883~1884년 사목보고서)

저의 구역은 전라도와 경상도 전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라도의 신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오래된 신자들로서 제가 사목 방문을 갔을 때 공소나 회합장소를 마련하느라고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자기들의 의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들은 착한 신자들이며, 성사준비를 착실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까지 있었던 이전의 박해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어 과잉으로 조심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웃의 구원에 대한 열의가 부족한 것인지 이웃의 외교인들에게 무관심해 보였습니다. 때로는 친척들에게조차 무관심하며 냉담한 신자들의 회개조차 깨우쳐 주지 않았습니다.… (경상도) 대부분이 신영세자들인데 그들은 매우 열심입니다. 특히 비신자들의 입교 인도에 감탄할 만큼 열성적이며, 그에 수반되는 부작용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천주교를 받아들이기로 한 어느 외교인은 영세 받을 준비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친척과 이웃들에게 전교를 합니다. 대구의 여자 신자들은 때로는 무모하다고 할 정도로 열심이며, 전교회장은 그녀들의 열정을 완화시키고자 고심합니다. 저 자신도 그녀들을 나무라면서 좀 더 부드럽게 행동하라고 충고합니다.」(1885~1886 년 사목보고서)

 

로베르 신부님은 한국에 입국해 처음에는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1882년부터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순회전교사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로베르 신부님이 겪었던 경상도와 전라도의 신앙인의 양상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긴 박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라도는 신앙인들이 많이 살았고, 그에 비해 경상도는 신앙인이 적었습니다. 그렇기에 병인박해의 극심한 박해를 겪은 뒤에 전라도 지역에 사는 신앙인들은 신앙을 버거워했지만 그에 비해 경상도 지역의 신앙인은 신앙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베르 신부님은 경상도 지역에 본당을 세우는 것이 어떨지에 대해 깊은 숙고를 당시 교구장이었던 블랑 주교님에게 부탁합니다. 특히나 도의 중심지인 대구에 본당을 세우고 싶어 합니다.

여하튼 로베르 신부님이 경상도 지역 담당으로 1885년경 부임하게 되고 처음에는 신나무골에 거처를 마련합니다. 대구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이지만 이곳에서 대구까지 왕래하면서 선교사로서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1888년경 대구의 죽박골(지금의 새방골)에 거처를 둡니다. 신나무골은 새로 대구에 온 보두네 신부에게 맡겨두고 말입니다. 새방골이 대구에 더 가까웠기에 더 왕성한 사목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91년 말 로베르 신부님은 남산공소(지금의 주교좌 계산성당)로 거처를 옮깁니다. 남산 공소의 초창기 모습은 전해진 것이 없지만, 성요셉 임시성당(1896년경에 세운 성당으로 남산공소가 협소해서 확장공사 하는 와중에 세운 그야말로 임시로 세운 성당이다.)의 모습은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베르 신부님이 남산공소로 옮겼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120여 명의 신자는 1894년에 400여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그래서 로베르 신부님은 장차 많은 신자들을 수용할 큰 성당을 지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성요셉 임시성당에서 남산공소를 확장공사하면서 한옥성당을 짓게 되고, 1898년 12월 25일 성당을 완공합니다. 하지만 성당은 불과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01년 2월 4일 화재로 소실됩니다. 아마도 로베르 신부님은 많은 번민을 하며 주저앉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베르 신부님은 이를 원망하지 않고, 주님이 주시는 시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더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으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1902년 벽돌로 지은 현재의 계산성당이 탄생합니다.

 

로베르 신부님의 사진은 남겨진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로베르 신부님의 사진 중에 몇 개를 소개합니다.

 

교구청 사무처 사료실에 있는 대구대목구 선교사 이력서 중 로베르 신부님의 이력서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왕 대축일도 지난 연중시기의 마지막을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력으로는 올해가 마무리되는 마지막 주간입니다. 가을도 한참 지났습니다. 성모당과 교구청 주변의 나무들이 다 옷을 벗었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나무에 잎사귀들이 한들한들 붙어있었지만, 이제는 그 잎사귀들이 다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뭇잎이 갑자기 떨어지듯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갑자기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든,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든 간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성모당에서는 참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저마다의 이유로 미사에 참여하고 기도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애환 때문에, 잊지 못하는 고통 때문에 기도를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기도를 합니다. 가끔 신자분들이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신부님!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항상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제가 제 모습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나약하고, 모자라고, 때로는 신앙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신자들이 기도해주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면 더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제가 가진 신앙을 안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굳건함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실 신부인 저도 세상에 자주 흔들리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특히나 조금만 더 가지고, 무엇을 통해서 기쁨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길 때 무척이나 힘듭니다. 때로는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라는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때로는 코헬렛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것이 허무하고 허망하며, 쓸데없는 행동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하느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서 힘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제인 제가 스스로 그 사랑을 체험하기보다는 의심할 때, 느끼지 못할 때 갖는 허망함과 괴로움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체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주님, 다시는 흔들리거나 힘들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리고 주님께 매달리면서 기도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저 자신을 보면 한심하기도 합니다.」

 

대구대교구의 초석을 닦아나가고 성모당을 봉헌했던 드망즈 주교님, 대구에 부임해서 수많은 시련을 겪었던 로베르 신부님, 이 두 분도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의 손으로 지은 성당이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어떻게 다시 잡아나갈 수 있었을까요? 그냥 대단하다고 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수많은 과정 안에서 끊임없이 고민했던 우리 신앙선조들처럼 번민 앞에서 씨앗을 틔워 나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신앙인입니다. 하느님 나라 실현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많은 과정이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춥고 어두운 밤도 보내고 비바람도 견뎌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에 대한 여정에 항상 밝고 기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실의도 겪고 어두움도 겪게 됩니다. 불안과 고독을 이겨내지 못해서 흔들리기도 합니다. 마음이 허공을 헤맬 때, 어둡고 추운 밤이 다가올 때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삶 안에서 한숨이 나올 때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우리의 손을 잡아주실 것입니다.

 

* 그동안 성모당 봉헌 100주년의 해(1918~2018)’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연재를 맡아주신 이찬우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