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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다시 읽기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아모스와 호세아


글 강수원 베드로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내 백성은 나를 배반하려고만 한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7-8 참조)

 

예나 지금이나 ‘안전 불감증’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보고서에 따르면 1906년에서 2005년까지 100년간 지구 평균온도가 0.74도 올랐습니다. 결코 미미한 변화가 아닙니다. 이 정도 온도 상승에도 우리가 체감할 정도로 기후가 변하고 있고, 무분별한 자원 남용과 온실 가스 배출로 생태계 파괴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지구 평균 온도 상승과 해수면 상승 속도는 최근 10년간 더 가속화되었고, 세계 각국은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2100년까지 평균 온도 상승폭을 1.5도 이내로라도 제한하자는 협약을 맺었지만 이미 그 약속은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이대로라면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을 맞게 될 것이 뻔한데도, “2100년? 내가 그때까지 살지는 않겠군.” 하는 생각부터 먼저 드는 건 인간의 간사한 마음 탓이겠지요. 무엇이 문제인지 모두가 뻔히 알고 있고 이렇게 살다가는 공멸(共滅)의 길로 갈 것이 불 보듯 뻔한데도, 사람들은 함께 지금의 잘못된 삶의 방식을 단호히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문득 어릴 적 들었던 개구리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끓는 물에 살아 있는 개구리를 넣으면 깜짝 놀라 뛰쳐나오지만, 찬물에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끓이면 온도차를 느끼지 못하고 죽어간다.’ 사실 사람들의 이런 ‘개구리 같은’ 모습은 비단 기후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종종 발견됩니다. 그런 모습은 임박한 멸망을 경고하는 예언자들의 호소를 외면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변화를 미루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앞서 보여준 나쁜 표양을 닮아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뒤(기원전 935년경)에, 남·북왕국에는 각각 시대의 상황에 맞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특별히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우선 가장 널리 알려진 이들로 이스라엘 예언운동의 시조(始祖)격인 엘리야와 엘리사(1열왕 17장-2열왕 13장), 최초의 ‘문서 예언자들’인 아모스와 호세아가 있습니다. 물론 이밖에도 예로보암의 즉위와 그의 가문의 멸망 모두를 예언한 아히야(1열왕 11,29-39; 14,2-16), 베텔의 산당 몰락 예언과 관련한 익명의 예언자들(13장), 바아사 임금 가문의 몰락을 예언한 예후(16,1.7.12), 아람과의 전쟁에 개입했던 익명의 예언자들(20,13-43), 아합의 패전을 예언한 미카야(22,13-28), 장수였던 예후를 임금으로 세우려 엘리사가 파견한 예언자(2열왕 9,1-10), 요나서의 주인공인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14,25) 등 여러 예언자들도 있지요. 이 북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활약을 담은 열왕기의 대목들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하면서, 우리에게 ‘예언서’를 남겨준 북이스라엘의 두 문서 예언자들, 아모스와 호세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려합니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최초의 문서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했던 시기(기원전 760-750년경)는 북이스라엘을 한창 압박하던 아시리아와 시리아 모두가 정치-군사적으로 주춤했던 때로, 이때를 틈타 북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동편 영토를 회복하고 유례없던 부를 누렸습니다. 악한 임금 예로보암 2세가 마치 다윗처럼 40년간(완전한 수[!]) 평화로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자신의 성덕이나 유리한 국제 정세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신실하심 덕분이었지만(14,27) 임금을 위시한 백성들은 오히려 긴장을 놓아버리고 풍요와 향락에 빠져 들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껍데기뿐인 허례허식으로 채워지고, 가진 자는 약자를 유린하고 수탈하는 사회 불의가 판치던 때였지요.

아모스는 남유다의 산악지대 트코아 출신의 목양업자요 농부였는데(아모 1,1), 양떼를 몰고 가던 중에 하느님께 붙들려 그분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7,15)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 ‘포효하는 사자후’와 같았다고 기억합니다.(1,2; 3,8) 인간의 눈에는 유례없이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기에, 감히 딴 나라 남유다 출신 ‘촌놈’이 그나마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닌 자”(7,14)가 북이스라엘의 중앙 성소 베텔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잘못을 꾸짖고 멸망이 임박했다고 선포하니, 지도자들과 제도권 사제들로서는 미칠 노릇이었지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아모스를 공공질서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반역자로 몰며 남유다로 추방하려 하지만(7,10-16) 아모스는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며 예언을 이어갑니다. 이런 패기와 당당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그 숱한 예언자들을 두고 굳이 평생 목양업자요 농부였던 사람, ‘양은 목자가 이끄는 곳으로 향해야 하고, 심겨진 나무는 제때에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함’을 온 몸으로 알고 있는 아모스를 뽑으신 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나 봅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모든 판단의 중심에 두고서 모든 갈등과 박해를 이겨내는 아모스의 우직함, 특히 권력자들에게 맞서 침묵하지 않았고 가난한 이와 약자의 편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외쳤던 그의 모습은 우리가 닮아야 할 참 신앙인의 전형입니다.

 

아모스 예언자의 메시지

먼저 아모스는 이웃의 여섯 나라들(아람, 필리스티아, 티로, 에돔, 암몬, 모압)과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악들을 차례로 고발하고 징벌을 예고합니다.(1,3-2,16) 이웃 이방 나라들의 죄는 주로 다른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저지른 인간 차원의 폭력일 뿐이나, 하느님의 백성인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겨난 것들이기에 더욱 심각합니다.(2,4-16)

이어서 아모스는 본격적으로 북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고 심판을 예고합니다.(3-6장) 수도 사마리아 주민들의 폭력과 억압과 종교적 타락은 말할 것도 없고(3,9-15), 여인들마저 약자를 억압하고 짓밟으며 향락에 빠져 있었습니다.(4,1-3) 형식뿐인 예배(4,4-5)와 하느님을 고집스레 외면했던 모습들(4,6-12) 앞에서 지도자들은 그저 교만과 방종을 일삼고 있었지요.(6,1-7) 결국 아모스는 하느님께서 깊은 탄식과 슬픔으로 그들에게 심판과 징벌(유배)을 경고하셨음을 선포합니다.(5장; 6,8-14) 당시 북이스라엘 백성의 죄상을 묵상하다보면 어느덧 나의 모습과 자연스레 겹쳐져 주눅들 때도 있지만, 질책과 심판의 경고 안에 담긴 하느님 아버지의 진심은 다름 아닌 ‘회개에로의 초대’임을 새삼 깨달을 때면 다시금 힘을 내곤 합니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5,14)

이어서 아모스는 다섯 개의 환시를 통해 코앞에 닥친 심판에 대해 선포합니다.(7,1-9,10) ‘메뚜기 떼’와 ‘불’에 대한 환시는 흉작과 가뭄을 통한 심판을 의미하는데, 이 첫 두 환시에서는 아모스가 중재에 나서고 하느님은 징벌을 멈추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나머지 세 개의 환시에서만큼은 아모스도 더 이상 중재하러 나서지 못합니다. ‘다림줄’의 환시는 공사할 때 수직을 가늠하듯 하느님의 심판이 엄정할 것임을, ‘여름 과일 한 바구니’의 환시는 금방 썩어 없어질 여름날 과일처럼 북이스라엘이 망할 것임을, 마지막으로 ‘성전의 진동’ 환시는 임박한 하느님의 결정적인 심판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느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전한 멸절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9,8) 아모스는 마지막에 구원의 신탁(9,11-15)을 전하면서, 다윗 가문(9,11)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예언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아모스는 백성이 아무리 죄로 스스로를 철저히 망쳐버린다 해도, 하느님께서는 단련과 정화의 계기를 통해 그들을 반드시 구원으로 돌려 세우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예언자, 호세아

호세아는 아모스 이후 등장하여, 예로보암 2세의 통치 말기부터 왕국이 멸망하기까지(기원전 750-722년)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이 시기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정치, 종교 모든 면에서 무너져 망국의 길을 걷던 시기입니다. 예로보암 2세 사후(기원전 747년경) 아시리아가 다시 세력을 회복하면서 국운은 급속히 기울었고, 그 와중에 아시리아로부터 주권을 회복해 보겠다고 이집트가 주축이 된 반(反)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하기도 하고, 동맹에 가담하지 않는 형제의 나라 남유다를 아람과 함께 힘을 합쳐 공격하는 못된 짓도 했지요. 아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서 기회만 엿보며 그저 인간적인 방편만 찾았을 뿐, 유일한 도움이신 하느님께는 의탁하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종교적 타락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왕실과 백성 모두가 가나안 토속 신앙인 바알 신앙에 젖어버렸고, 왕실의 비호를 받은 바알 신앙은 야훼 신앙과 교묘하게 어우러져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하느님을 잊고 제멋대로 살며 예언자들의 회유를 거절했던 이 백성이 결국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멸망했음(기원전 722년)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이런 혼란의 시기에 하느님께서는 호세아를 예언자로 세우시면서, 가장 먼저 그에게 창녀를 아내로 맞아들이라 명하셨습니다. 그것은 호세아의 삶을 통해 당신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끝까지 사랑하는 남편’과 ‘그를 배신하고 창녀 짓을 하는 아내’로 드러내면서(1,2) 잘못을 질책하고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려는 것이었지요. ‘아니, 말로 하면 되지, 굳이 창녀를 아내로 맞으면서까지 그걸 꼭 삶으로써 드러내야만 했나?’라고 생각하는 분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지만, 입으로 선포하는 말씀뿐만 아니라 몸으로 구현하는 상징적 행위(예. 에제 4-5장), 필요하다면 인생 전체(예. 호세아의 결혼 생활)가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는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백성이 알아듣게 할 수만 있다면, 인생 전체를 초개처럼 던졌던 이들이 바로 예언자들이었지요. 과연 호세아가 인생 전체를 걸어 직접 보여준 하느님의 참 모습은 창녀(이스라엘)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또 외간 남자를 찾아 집을 나간 그녀를 다시 받아들여 끝까지 사랑하는 남편의 지고지순한 순정이었습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메시지

호세아가 아내로 맞아들였던 창녀의 이름은 ‘고메르’입니다. ‘창녀 짓’(1,2)이라 일컬어지는 고메르의 배신과 불륜은 가나안 바알 신앙에 빠져 하느님을 저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타락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호세아와 고메르 사이에서 난 세 자녀들의 이름은 하느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1,3-9) “이즈르엘”은 예후 왕조의 몰락을, “로 루하마”는 더 이상 하느님의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로 암미”는 더 이상 하느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는 죄스런 상황을 상징합니다. 그렇지만 호세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회복되리라 선언하면서,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자녀, 백성’이라 부릅니다.(2,1-3) 그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배신을 고발하면서도(2,4-15), 결국엔 다시 회복될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선포하길 잊지 않습니다.(2,16-25) 도망갔던 부정한 아내를 또다시 인내와 사랑으로 맞아들이는 호세아의 모습은 우리에 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변함없는 자비와 사랑을 그대로 보여줍니다.(3장) 제 아무리 초라하고 볼품없는 죄인이라 해도 하느님께는 ‘가장 소중한 사랑, 결코 놓아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호세아의 메시지에는 질책과 위로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이러한 메시지는 오히려 ‘백성의 지속적인 죄상’과 ‘한결같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고(14,1-9), 백성에게 삶과 죽음의 길을 제시하면서 선택을 요구합니다.(14,10) 물론 이 선택의 요구는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요청이기도 하지요.

 

하느님과 인간의 엇갈린 시선

이스라엘 역사에서 큰 사건들은 예언자들에 의해 언제나 먼저 예견되었고 그대로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일에는 까닭이 있고 우연히 일어난 일이란 없으며, 그 모든 일은 예언자들에 의해 앞서 예고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계 역사가들은 “주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1열왕 13,26; 14,18; 15,29; 16,12.34; 17,26; 22.38; 2열왕 1,17; 10,17; 24,2.13)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은 ‘이게 맞는 건가?’, ‘받아들일까, 말까?’의 문제, 곧 인간의 판단과 가부 결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할 대상이지요.

아모스와 호세아의 예언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불과 삼사십년 전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신앙의 선조들, 이스라엘 백성의 관심사는 ‘현재’에만 머물러 있었지요. 아모스와 호세아 예언서를 읽다보면, 하느님을 등지고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고집스레 가는 백성의 시선과 이를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보며 돌아오라 손짓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이 엇갈려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언서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바로 그 안타까운 시선이 오늘을 살고 있는 내게도 향해있음을 가슴깊이 공감하며 그분을 바라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예언서의 말씀을 현재 나의 삶에 비추어 성찰하고 약속된 구원을 희망하며 깨어있는 모습으로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우리의 응답일 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