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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교이야기
민들레 홀씨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를 이 세상에(2)


글 김민자 마틸다|흥해성당 사무장

 

저는 20여 년 전 이곳 흥해로 이사를 왔습니다. 공무원인 남편을 만나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처음으로 내집인 아파트를 마련했습니다. 며칠 뒤에 옆집도 이사를 왔는데 이삿짐트럭에 보행기가 실린 것을 보니 우리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옆집 자매님은 저와 동갑으로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그 집 형제님은 외모에서 풍기듯이 독립심이 강하고 개성이 너무 강해서 자매님의 삶이 힘들어 보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마음대로 나가서 놀지 못하게 하고 자매님 또한 형제님의 허락 없이는 외출이 자유롭게 못했습니다. 형제님이 퇴근할 시간이면 바로 옆집인 우리집에서 놀다가도 얼른 돌아가야했습니다. 자매님은 아이들을 우리집에 맡겨두고 청소를 하느라 늘 분주했습니다. 늦은 시간에 외출이 허용되는 장소는 유일하게 우리집밖에 없었습니다.

자매님은 신앙은 없었지만 너무도 착하고 여리고 눈물도 많았고 제가 성당에 다니는 걸 늘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같이 가자고 하면 “우리 신랑 성격 알제?” 하면서 말도 못 붙이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서 용기내어 옆집 초인종을 누르고 성당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참을 웃던 옆집 형제님은 갑자기 주먹을 보이면서 “나는요 내 주먹을 믿지. 아무 것도 안 믿어요.”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우리 아이들이 성당에 갈 때 형제님의 자녀들도 같이 데리고 가도 될까요?”라고 물었더니 그것은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토요일이면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남편 차에 우리 아이들과 옆집 아이들을 같이 태워서 주일학교에 다녀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친정어머니가 병환으로 우리집에서 몇 달 동안 계시다가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아파트 총무를 맡고 있어서 아파트에서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 마당에 천막을 치고 손님을 맞고 성당에서도 많은 분들이 오셔서 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옆집 형제님이 갑자기 “천주교 참 괜찮네.”라고 하더랍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옆집 큰 아이와 우리 아이가 첫 영성체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세례를 받게 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괜찮다면서 이제는 자매님을 데리고 가도 된다고 허락했습니다. 그렇게 자매님은 열심히 교리를 받았지만 어쩐 일인지 세례 받는 날까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례 받는 날 아침에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 한복을 입고 미용실에 다녀오다가 갑자기 개가 덤벼들어 한복을 찢어놓았다면서 이건 아닌 것 같다며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한없이 안타까워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옆집 자매님이 꼭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기를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주님의 은총으로 자매님과 아이들이 드디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옆집 형제님을 입교시키기 위해 제 남편이 술자리도 같이 하고 밤늦도록 바둑도 두었더니 서서히 마음을 여는 것 같았습니다. 신자인 우리 부부가 너무 부럽다고 하기에 같이 가자고 했더니 순순히 교리반에 등록했습니다. 그러나 몇 번 교리를 받더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고 힘이 든다면서, 남편과 제가 교리반에 여러 번 봉헌하여 기도했으나 여러가지 핑계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락도 없이 전화도 받지 않고 나오지 않아서 남편이 옆집 초인종을 눌렀더니 안에 사람은 있는데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자매님이 제게 그날 형제님에게 “다음에 하겠다고 하면 되지. 약속해 놓고 문도 못 열게 하느냐!”고 했다면서 너무 미안하다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희 가족은 성당 근처에 위치한 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왕래가 줄어들면서 옆집 자매님은 서서히 성당에 잘 나오지 않게 되었고 오랜 냉담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자매님이 미안해할까봐 종종 그 집의 편지함에 주보를 꽂아두고 대문 앞에서 성호경을 긋고 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가까운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 형제님의 큰 딸 이름을 얘기하면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는 이제 스물네 살인 제 대녀 유스티나였습니다. 정신없이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자매님이랑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형제님은 미안하다고, 너무도 미안하다며 통곡을 했습니다. 너무 염치가 없어서 성당에 직접 전화하지는 못하고 병원에 천주교 신자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유스티나야, 대모님이 기도한다. 이제 성당에 나오너라.” 하면 환하게 웃던 대녀의 얼굴이 지금도 문득문득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 속에 유스티나를 장례미사로 하느님께 보내고 형제님은 곧바로 교리반에 들어가서 다시 교리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5년 만에, 여러 번의 교리 끝에 하느님의 자녀 ‘세례자 요한’으로 다시 태어난 그 형제님은 제 남편의 대자가 되었습니다.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고집스러웠던 형제님의 예전 모습은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며 조용히 눈을 감고 부부가 함께 미사를 드리는 모습이 더 없이 평온해보입니다. 지금 그 부부는 레지오 단원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들 부부에게 평화를 주시고 늘 지켜 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