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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현장에서
함께 산다는 것!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 복덩이 이야기


글 박미해 글라라 | 성요셉재활원 생활팀 팀장

 

세상은 시설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과 탈시설을 이야기하는데 시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는 마음이 무겁다. 이 글이 시설에 대한편견과 오해를 주는 일이 없길 바란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성요셉재활원 요양원의 주인공인 우리 복덩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성요셉재활원의 인수자이신 고(故) 박병기 신부님께서는 이곳을 인수할 당시 인분냄새와 악취로 호흡이 혼란할 정도의 열악한 개인시설이었다고 하셨다. 이를 가톨릭에서 인수해 올해로 30주년이 된 성요셉재활원의 복덩이들은 대부분 15~20년 이상 이곳에서 지내고 계신다. 이곳이 집이고 고향인 100여 명의 복덩이들이 함께 지내고 있으니 100여 가지의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성요셉재활원의 복덩이들 가운데 몇 분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그들의 삶을 보여드리려 한다.

 

삶의 이야기 “봄”

올해로 스무 살이 되는 우리 재활원의 막내, 내 딸 보나의 이야기다. 지금부터 15년 전 11월의 어느 날 새벽, 문 앞에 유모차가 놓여있었다. 그 안에는 이름이 적힌 메모와 빡빡머리에 까만 털옷을 입은 천사 같은 아기가 있었다. 그 아기는 미소 한 번, 목소리 한 번, 움직임 한 번으로 희망과 기적을 보여주며 선생님에게 보람과 기쁨을 주었다.

보나가 처음 내 품에 온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안고 있으면 마치 인형처럼 그 모습 그대

로 작은 미동조차 없었다. 당시 다섯 살이었으나 세 살 정도의 작은 체구로 젖병을 물고 있었고, 소리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아기가 꽤 오랫동안 함께 연습하면서 이제는 핸드레일을 잡고 서서 혼자 휠체어를 타고 전동휠체어를 운전하며 학교를 다니기까지 했다. 지금은 감사하게도 내가 며칠 보이지 않으면 “엄마,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는 스무 살의 예쁜 아가씨가 되었다.

 

삶의 이야기 “여름”

스물여덟에 애교가 많고 상냥하면서도 조금은 까칠한 크리스티나의 이야기다. 일곱 살에 처음 와서 작년 11월에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집을 떠났다. 겁 많은 아이가 꿈과 희망의 불씨가 되었고 ‘청춘’이라는 뜨거움이 누구보다 더 용감한 어른으로 만들어주면서 주변의 걱정을 이기고 씩씩하게 자신이 선택한 길로 떠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똑똑하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크리스티나는 일상생활에서 99%의 보조가 필요한 심한 중증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홀로 자립을 하겠다고 하니 모두들 걱정이 앞섰다. 가장 큰 난관은 부모님의 반대였다. 자립을 위해 3년 넘게 선생님들과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결심은 더 단단해졌다. 사실 어머니도 이미 크리스티나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장례식장에서 근무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꽤 많다는 사실에 장애를 가진 딸에 대한 걱정이 크다면서, 정말 나간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고 하시면서 떠나는 날에도 오지 않으셨다.

탈시설! 시설의 소규모화로 장애인들이 시설을 퇴소하고 사회로 나가는 것을 장려하고, 어떤 곳에서는 시설 소개에 광고처럼 퇴소까지의 거창한 스토리텔링을 그리기도 한다. 시설 퇴소가 끝이 아닌데….

자립을 준비하는 크리스티나와 마주한 세상은 아직도 중증장애인들이 사회에 나가서 스스로의 삶을 살기에는 모든 것이 벽이었다. 도움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활동보조인 지원부터가 큰 벽이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해야 하니 야간은 어렵고 대기자가 충분치 않으니 갑자기 공백이 생기는 등 시작부터 어려웠다. 이 무책임함에 화가 난 내게 크리스티나는 “팀장님,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실망시켜드리지 않고 꼭 잘 살게요. 지켜봐주세요.”라고 했다. 주변의 걱정어린 시선을 이기고 자신의 선택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며, 꿋꿋이 잘 살아갈 우리 크리스티나, 너의 빛나는 청춘과 삶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할게.

 

삶의 이야기 “가을”

“아줌마, 내 이야기 쓰면 내한테도 보여줘야 해.” “내가 영감님 욕 할 건데 안 보여줄거라요.” “으이구, 저 문디 아줌마~” 이것은 우리집 호주인 노 씨(베드로) 아저씨와 나의 대화법이다.

“내가 이래도 3대 독자 아이가. 우리 아부지, 어무이가 아들 낳을라고 내 위로 딸을 열이나 낳고 마지막으로 나를 낳아서 그래 좋아했는데 내가 이래 가지고… 내 고칠라고 좋은 거라는 건 다 구해다 먹였는데… 그래가 내가 감기도 한 번 안 하고 크게 안 아프고 지금까지 안 사나.” 베드로 아저씨는 다시 태어난다면, 두 발로 걷고 움직일 수 있는 몸으로만 태어나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아저씨는 서른세 살에 이곳에 와서 올해로 34년째 지내고 계신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소주 한 병을 드셔야 하고, 하루에 담배 한 갑 이상을 피우신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4년 전 어느 날, 비뇨기암이 이미 뼈에까지 전이가 된 상태라는 날벼락 같은 진단을 받았다. 그 소식에 30년 넘게 늘 함께해 온 애틋한 연인과 같은 담배를 끊으셨다. 금연에 성공하고 보건소에서 받은 냄비를 내게 건네주시며 “이거 아줌마 주고 싶은데 받으소. 여기다 맛난 거 해먹으소.” 하는데 받기엔 너무 마음이 무거워 “그렇게 잔소리해도 안 되더니 억시로 오래 살고 싶은가 보네.” 하고 아픈 마음을 감추고 장난처럼 하는 말에, “내가 오래 살고 싶어 카나. 내가 아파서 선생님들 애 먹일까봐 카는 거지. 내 부탁은 내 죽을 때까지는 우리집에 있어주소.” 라는 아저씨의 말씀이 감사하면서도 무겁고 미안하다.

 

삶의 이야기 “겨울”

우리집에 살면 죽음을 정말 가까이에서 보게 된다. 열여덟 살에 어머니가 갑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우리집에 오게 된 마리아는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하늘로 떠나기까지 1년을 함께했었다.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로 말대답하며 따지던, 똑똑하면서도 도도함 그 자체였던 마리아가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벌써 5년째다. “선생님, 자꾸 어디 옥상인가 높은 데서 내가 떨어진다. 떨어지면 땅으로 깊숙이 빠지는 것 같다.” 는 말에 신부님께서는 병자성사를 주시며 “이제 떨어지는 꿈은 안 꿀 거다.” 라고 하셨고, 며칠 뒤에 “선생님, 신부님 신기하다. 진짜 내 떨어지는 꿈 안 꾼데이.” 하고 신기해하던 마리아.

 “선생님, 우리가 무슨 복덩이고? 누가 복덩이라고 지었노?”라고 묻던 모습이 아직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대장암 말기로 힘들어하던 마리아는 마지막에는 입으로 들어가는 물 한 모금조차 다 토해내고 옆구리로 빼놓은 장루로 흘러넘치는 상황에 수액으로 영양과 수분을 공급해줘야 했다. 입으로 먹으면 본인이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려도 먹지 못하니 오히려 더 먹고 싶은 것이 많아서 “선생님, 한 번만! 한 번만!” 하며 애원하듯 졸라서 어쩔 수 없이

주면 삼키자마자 구토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봐야 했다.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까지도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아 죽어도 좋으니 통영에 가고 싶다고 애원을 해서 링거를 꽂고 간호사와 셋이 함께 떠나기도 했다.

자신의 속을 쉽게 내보이지 않던 아이인데 암이 깊어짐을 본인도 느꼈는지 죽음이 다가올수록 나에게 의지하고 싶어하던 눈빛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정말 살아있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어 보였던 날 처음으로 나는 “마리아, 선생님이 아무리 잘해 줘도 엄마만큼 못하잖아. 엄마 만나러, 하느님 만나러 가는 거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라고 이야기를 해버렸고, 그 말에 “알겠다.” 라고 대답한 마리아는 다음날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를 하느님 나라에 보내는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는 크고 작은 상처로 남는다. 죽음 앞에서는 늘 후회와 죄책감이 있고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불안함이 있다. 그걸 아셨던 신부님은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일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기도해주시고, 마음 아파해주시고, 세상을 떠나는 작고 마른 그 아이에게 너무 큰 관이 흔들릴까봐 직접 신경 써주셨다.

 

이렇게 우리집은 새로이 삶을 계획하는 분,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는 분 등등 모두의 다양한 사연과 삶이 있는 곳이고, 그 삶이 되도록 풍요롭고 외롭지 않도록 선생님들과 신부님의 노력이 함께하는 곳이다. 하느님 보시기에 흐뭇하실 수 있는 복덩이들의 집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집을 위해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고 응원해 주심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응원을 부탁드리며 글을 마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약력 : 박미해 님은 2002년에 성요셉 복지재단에 입사해 성요셉요양원, 재활원(중증장애인시설이며 100명의 장애인들이 거주하는 거주시설)의 생활실(장애인들이 살고 있는 방, )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직접 서비스를 하는 생활재활교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