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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 영성 수련기 ②
거룩한 독서 영성 수련을 마치고


글 이요람 요람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대학원 2학년

 

어느덧 지난 시간이 되어버린 1월 21일, 거룩한 독서 영성 수련이 한티순교성지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 도착하여 처음 시선이 머물던 곳은 다름 아닌 옛 한티마을의 형태를 복원한 초가집이었다. 이엉을 엮어 올린 지붕은 내려앉고, 창호지를 바른 문은 뜯겨졌고, 비바람을 견디지 못한 흙벽은 처참히 무너져 내린 퇴락한 초가집. 닳고 무너져 가는 초가집의 모습이 마치 나의 영적 상태와 같아 보여 그토록 오랜 시간 쳐다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님의 도구가 되겠노라고 호기롭게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온전히 세속을 따르며 육에 이끌린 삶을 그동안 살았다. 쟁기를 잡고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는 것이 아닌 걱정과 불안에 매여 어제에 머물고, 오지 않은 내일을 내다보며 지냈다. 영성 수련의 중요한 요소인 ‘침묵’이 익숙하지 않아 창밖을 보며 웃기도 하고, 잠꼬대로 박장대소하다 잠에서 깨어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동반자 신부님과 이루어진 면담 시간의 절반은 말씀에 관한 내용보다 내 삶에 관한 시간으로 할애되었다.

그리스도를 옷 입듯 입은 주님의 자녀가 아닌 세속에 온전히 절여진 나에게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에 깊이 적셔지는 시간은 마냥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무한하신 하느님을 자꾸만 분석하고 이해하려 하다 보니 가슴은 절절한 사랑으로 끓어오르기보다 답답함, 캄캄함 등과 같은 주님과는 ‘먼’ 것들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성전에 앉아 거룩한 독서를 하다 보면 고요함 가운데 말씀을 묵상하는 형제들의 모습, 주님의 이끄심을 기록하는 형제들의 모습에 조바심이 들기도 했고 이내 그 마음은 자책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한 탓에 한동안 기도와 미사 시간 외에는 성전 출입을 멀리한 적도 있었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생각과 욕심을 버리는 데 집중한 날도 여러 날이었다. 그뿐 아니라 오랜 시간 나를 괴롭힌 ‘여러모로 부족한 나의 모습’에 대한 인식이 주님께로 나아가는데,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데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귀 먹고 말 더듬은 이에게 “열려라!”(마르 7,34) 하고 말씀하신 예수님, 믿지 못하는 당신 제자 토마스에게 “손을 뻗”(요한 20,27)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이 즈음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요한 8, 1-11)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꺼내어 되새기고 싶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그를 단죄하고자 모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간 후 어느덧 주님과 단 둘이 남게 된다. 그때 나의 예수님께서는 “너를 단죄할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 8,10) 하고 물으신다. 그때 그 여인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요한 8,11)라고 대답한다. 놀랍지 않은가? 주님과 마주선 채 했던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죄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 그 자체였다. 그 여인의 고백은 해방과 용서로 이끈 고백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나의 입을 통해 듣고 싶으셨던 ‘나의 고백’이었다.

그분께서는 자책하고, 숨고 싶고, 떠나가고 싶어했던 죄 많은 지난날의 내가 넓고 깊은 당신의 용서 안으로 들어오길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여인의 짧은 고백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로운 시작 지점이 되었던 것처럼, 이 이야기(요한 8,1-11 참조)는 나를 전환점 위에 올려놓기에 충분했다.

 

이후 내 삶 한가운데에서 한없이 기다리고 계셨던 나의 예수님과 보낸 시간은 실로 빠르게 흘러갔다. 나의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손수 이끌어주신 그 시간은 세속의 삶이 주는 어떠한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이 뜨겁고 강렬하고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그분의 이끄심이 때로는 두렵기도 하고 아이러니하여 뒷걸음질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자비하신 나의 예수님은 당신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던 것(마태 28, 9-10 참조)과 같이 나에게 평안을 찾아주시고 두려운 마음을 거두어 주셨다.

평안 가운데 마주한 예수님은 한 토막 생선(요한 21, 1-19 참조)에 불과한 내 믿음을 기쁘게 받아 잡수시는 분이셨다. 또 자신의 말씀에 따라(영의 이끄심에 따라) 변화된 나의 삶으로 나를 위한 상(요한 21, 1-19 참조)을 완성시키고자 기다리시는 분이셨다.

 

한티순교성지는 지금보다 어렸던 시절, 나를 품어 준 자리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 아래와도 같은 자리가 되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쏟으신 피와 물로 온 세상의 죄를 씻으셨던 것처럼 영성 수련을 위해 이곳에 머물렀던 나의 많은 죄까지도 남김없이 씻어 주셨다. 이 여정의 처음과 끝은 예수님의 삶처럼 ‘용서’와 ‘사랑’ 그 자체였다.

 

뜻 깊고 뜨거웠던 여정이 어느새 마무리되어 내 삶을 가로지른 못자국으로 남았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겪고 초막을 지어 그곳에 머무르고자 했던 베드로의 마음이 자꾸만 나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다시금 느낀 바이지만 주님의 말씀은 선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요한 16,15)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한티순교성지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마음, 아쉬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세상 속에서 가끔은 한없이 나약했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지도 모르지만 그럴 때마다 이 여정을 기록한 노트를 펼쳐 새로이 다짐을 하고, 그곳에서 끝없이 누린 나의 예수님을 떠올리며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