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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비행기를 탈 때마다 든 생각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중국에서 생활할 때는 비행기를 타고 이동할 일이 많았습니다. 중국 내의 교구 사제 모임을 하거나 옆 본당의 신부님이 판공성사를 도와 달라고 해도 비행기를 타고 가야 했어요. 베이징에서 옆 본당 칭다오까지 가는 데 비행기로 두 시간이나 걸렸으니까요. 당시에는 중국 국내선 비행기가 그리 신뢰할 만한 게 아니어서 비행기를 탈 때마다 ‘이 비행이 내 생애 마지막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지금 죽어도 괜찮을지 돌아보곤 했습니다. ‘오늘 나오면서 방 정리는 제대로 했나? 사랑하는 부모님, 가족들과 인사는 못하겠구나. … 특별히 후회되거나 아쉬운 건 없는 삶이었나?’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지요. 물론 사제가 되어 주님의 일꾼으로 제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 많이 죄송하기도 하고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죽음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것이니까요. 이 비행이 마지막이 될지…. 그러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면 주님께 감사드리고 새로운 삶이 덤으로 주어진 것 같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때뿐, 이런 생각이 오래 가지는 않지요. 또 바쁘게 일상을 살다가 비행기를 탈 때면 다시 죽음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늘 마음으로 존경하는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벌써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지요. 그 분은 일찍 농촌으로 가 농사를 지으며 사셨습니다. 교구에서 생활비도 받지 않고, 농사지은 걸로 월 10만 원 남짓 썼다고 합니다. 가난한 농부의 삶을 사신 거지요. 70세를 앞두고는 혼자서 전국 국토순례를 하셨습니다. 동해안 휴전선에서 시작해 해안선을 전부 걷고, 울릉도와 백령도 같은 섬에도 찾아가 걸으셨다고 합니다. 120여 일 동안 3,000킬로 미터 이상을 걸었으니 상상도 하기 힘든 여정이었을 겁니다. 노구의 몸을 이끌고 순례를 하셨으니, 혹시 도중에 세상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유서를 미리 써 두셨답니다. 그 내용도 대단하지만 생의 말년에 우리나라 전국을 다니시며 세상을 바라보신 그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루살렘 도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마음이 생각납니다.(루카 19,41-44)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고발하고 욕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루카 23,34)

위령 성월입니다. 따뜻했던 양(陽)의 기운이 추위에 움츠러들면서 몸도 마음도 위축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연로하거나 병이 깊은 분들이 많이 돌아가십니다. 교회는 이런 시기에 위령 성월을 보냅니다. 세상을 떠나신 연령을 기리며 그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살아 있는 우리도 죽음을 미리 생각하며 남아 있는 삶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미리 죽음을 묵상하는 이유는 삶에 더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삶에 충실하고 그 의미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죽음의 의미도 잘 이해하고 죽음도 잘 받아들일 것입니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나의 삶을 잘 사는 것은 곧 나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이다.”1)라고 했습니다.

사제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연피정을 하면서 자신의 유서를 새로 작성합니다. 우리도 위령 성월을 보내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 해 보고, 나의 유서라도 한 번 써 보면 어떨까요? 죽음을 묵상하면 나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이 더 소중하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다가올 죽음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1) 『장자』, 「대종사(大宗師)」, “故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