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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칼럼
홍수와 구명보트


글 허윤정 엘리사벳 |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이야기입니다. 홍수가 나자 지붕에 올라가 하느님께 구해 주시기를 간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구명보트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이리 오라고 했지만 그 사람은 하느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탈 수가 없노라고 잘라 말합니다. 이후에도 구조선과 헬리콥터가 왔지만 같은 이유로 거부했습니다. 결국 물에 빠져 죽은 그는 하느님 앞에 가서, 그렇게 기도했는데 어떻게 자신을 내버려둘 수 있냐며 따졌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내가 너를 구하려고 세 번이나 사람을 보냈는데 네가 모두 거절하지 않았느냐?”라고 했습니다.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아이들 상장이랑 성적표, 편지들을 제가 정리해 둔 파일을 열어보게 되었습니다. 맨 앞장에 낡은 예방 접종 수첩이 있습니다. 일한다고 아이들의 예방접종 스케줄을 잊을까봐 애지중지 끼고 다녔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럼 중년에 접어든 내 예방접종은? 머잖아 80세가 될 시어머니 예방접종은 누가 챙기지? 나이가 들수록 아이들 못지않게 면역도 떨어지고 바이러스에 더욱 취약해질 텐데….

 

우선 어른이 되어서 챙겨야 할 예방접종은 어떤 게 있을까요? 주사 맞기 싫어서 독감에 걸린다 해도 한 이틀 아프고 말지, 하던 청춘도 이제 다 지나가고 감기조차 몇 날 며칠을 앓아야 하는 신세가 된 후부터 독감 예방주사는 매년 꼬박꼬박 잘 챙기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부터는 호흡기 감염, 폐렴에 대한 걱정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폐렴으로 인한 사망자가 국내 사망원인 3위를 차지했습니다. 외래진료를 하다 보면 아직 잘 모르고 있거나 깜박하는 분들도 많으시던데, 지난해부터 정부에서 65세 이상 어르신들께 23가 백신을 무료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뇨나 다른 질환이 있으신 분은 13가 백신을 먼저 접종한 후 23가 백신을 접종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인플루엔자 백신(일명 독감주사)은 매년 10월 전후에 맞지만 폐렴구균 백신 계절에 상관없이 접종하면 되니까 근처 병의원에 문의한 다음 올해 겨울이 오기 전, 특히나 무료 백신이 소진되기 전에 꼭 접종받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건 대상포진 백신입니다. 대상포진으로 죽는 사람은 잘 없지만 이 병이 유명한 이유는 '대상포진 후 신경통’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대상포진으로 고생했다는 얘기를 한두 번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척수 신경절에 잠복 상태로 있다가 우리 몸의 면역이 약해지면 물집과 통증으로 나타나는데, 나중에 피부가 멀쩡해져도 몇 년 동안 신경을 타고 통증에 시달리게 만듭니다. 고령일수록 통증이 심해지므로 60세 이상에서는 꼭 접종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백신비용이 저렴하지는 않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자녀들만 좋은 것 먹이고 좋은 주사 다 놔주고, 부모가 나이 들어 몇 날을 아프다 하면 주사 안 맞고 뭐했냐고 되려 자녀들에게 핀잔듣기 십상입니다. 그 정도는 나를 위해, 자식들을 위해 투자하셔도 됩니다.

 

세 번째는 파상풍·디프테리아·백일해 백신입니다.(놀라지 마세요. 3대의 주사가 아니고 1대입니다.) 응급실에 있어 보면 칼에 베이거나 못에 찔려 파상풍 주사-이때 맞는 건 대부분 일시적인 효과가 있는 면역 글로불린입니다-이때 맞으러 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파상풍은 상처 부위로 들어와 번식한 파상풍균이 신경독소를 만들어 근육 마비와 통증을 일으키는 질병입니다. 디프테리아는 호흡기 감염병을 일으키는데 요즘은 예방접종 덕에 거의 볼 수 없지만 파상풍과 함께 10년마다 한 번씩 파상풍, 디프테리아 백신(일명 Td)을 맞습니다. 1958년 이전에 태어나신 분들은 한 번도 이 주사를 맞은 적이 없기 때문에 기본 3차 접종을 하셔야 합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에서 백일해 환자가 급증하였는데 과거와 달리 청소년, 성인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렸을 때 백일해를 앓았거나 예방접종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면역이 10년 이상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요즘 손자, 손녀를 돌봐 주시는 부모님들이 많으시죠? 영유아에 치명적인 백일해가 성인 가족에 의해 아기들에게 많이 전파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를 봐주면서 기침이라도 하게 되면 며느리, 딸 눈치가 보이고 그러지 않으셨나요? 어차피 돌 전의 아기를 돌봐 주시기로 했다면 파상풍·디프테리아·백일해 백신(일명 Tdap)을 접종하시길 바랍니다.

 

다음은 젊은이들이 신경써야 할 백신입니다. 지금 50대 이상이신 분들은 아마도 어릴 적 감기처럼 앓고 지나가면서 A형 간염에 대한 항체가 대부분 생겨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가끔 진료실에서 젊은 사람이 피곤하기도 하고 열도 좀 있다고 해서 검사해 보면 간수치가 높게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반드시 A형 간염 검사를 하도록 합니다. A형 간염에 면역력이 있는 20-30대가 10%도 되지 않는다고 하니 40세 미만에서는 항체 검사 없이 바로 백신을 접종하셔도 됩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6학년 정도라면 무료로 자궁경부암 백신을 맞습니다만, 나이가 어정쩡한 젊은이들은 성생활이 시작되기 전 자궁경부암 백신 접종도 꼭 챙겨야 합니다. 또 풍진에 걸리면 태아 기형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결혼과 임신을 준비 중이라면 꼭 항체 검사를 한 다음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 이제는 상식이죠.

 

성인 예방접종 : 폐렴구균 백신/ 대상포진 백신/ 파상풍·디프테리아·백일해 백신/ B형간염 백신

젊은이 예방접종 : A형간염 백신/ 자궁경부암 백신/ 홍역/ 유행성 이하선염/ 볼거리 백신

 

일명 아제백신(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 백신)을 맞고 힘들어 하 는 젊은 직원들을 보면서 ‘비교적 멀쩡한 나는 뭐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 저보다 더 멀쩡한 원장 신부님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이 알쏭달쏭한 서글픔은 뭘까요? 우리 인생에 있어 이젠 아이들의 시대가 아니라 '나의 시대, 우리의 시대’입니다. 아이들의 예방접종 수첩을 들고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던 기억으로, 어른들을 위한 간단한 예방접종 관리 카드를 외래에 비치해두고 뿌듯하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광고 속 어여쁜 배우의 새침한 목소리를 상상하며 혼자 속으로 ‘내 몸은 소중하니까!’를 외치면서 첫 번째 구명보트를 띄워 봅니다. 거절하지 않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