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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독서일기
끝없이 열리는 저 편의 이야기, 그 너머를 향하는 상상


글 전형천 미카엘 신부 | 국내연학

 

1. 어떤 선생님은 '상상력’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셨습니다. 우리에게 ‘신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하셨지요. 아마도 사회학자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 개념을 빌려와, 신학의 개념으로 비틀어서 사용하려 하셨겠지요. 아무튼 저는 그 말을 주워듣고서는 거추장스러워 보였던 '신학’이라는 말머리는 떼어버리고 ‘상상(想像)’이라는 낱말을 자주 어루만지며 가지고 놀았습니다.

글자 뒤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 여행을 떠났던 사람들이 코끼리를 보고 돌아와 친구들에게 코끼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코가 길고 몸집이 집채만한 짐승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가서 코끼리뼈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함께 그 뼈를 보며 코끼리(象)의 모습을 생각(想)합니다. 코끼리뼈와 같이 현실의 조각과 흔적을 두고, 묻고 답하는 것이 상상이지요. 이 낱말에는 체험의 단단함과 분명함, 그리고 질문과 생각의 자유로움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저는 ‘상상’이라는 낱말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얼마 전, 누군가 문을 두드려 골방의 적막을 깨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몇 주 전부터 어느 본당에서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의 우울을 잠시나마 벗고 사람들을 만난 뒤, 골방에 돌아와 우울과 적막을 다시 뒤집어쓰고 책을 읽습니다. 문득 질문의 방향과 관심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주님의 얼굴을 마주하려 복음을 펴면서, 다음 주 강론을 어떻게 준비할지 고민합니다. 논문을 쓰려고 자료를 정리할 때에도, 이 공부가 현장의 사목에 어떻게 봉사할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책상에 앉아서 주일에 만날 사람들의 얼굴을 그립니다. 삶의 경험이 질문을 낳고 답을 하려 옹알거릴 때, 그제야 ‘상상’이라는 낱말을 다시 체험합니다. 떼어버렸던 ‘신학’을 주워와 먼지를 털어 다시 붙여놓고 ‘신학적 상상력’을 고민합니다.

 

2. 가끔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을 읽습니다. 과학은 수학을 언어 삼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탐구합니다. 과학의 대답은 너무도 분명해서 모순이 없어 보일 정도로 단단하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단단한 과학을 자재로 삼아, 이야기의 집을 짓습니다. 조금의 상상도 불허하는 과학을 가지고 마음껏 펼치는 상상력이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어슐러 르귄의 작품들, 그리고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가슴이 될 정도였지요. 그런데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마음이 가는 과학 소설가 한 명이 있습니다. 바로 김초엽 작가입니다.

김초엽은 각종 공모전과 잡지에 투고했던 단편 7편을 묶어 책을 펴냈는데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019)입니다. 김초엽은 “작가의 말”을 통해서 각 단편마다 자신의 상상력을 자극한 과학적 사실과 일상의 경험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사실 김초엽은 포항공대에서 수학한 자연과학도입니다. 과학에 대한 집요한 관심과 해박한 지식은 삶의 자리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김초엽은 그렇게 “탐구하고 천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이해”해보려고 했고, 그런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초엽의 소설은 과학소설이 아니라 과학적인 철학소설이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러합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초광속 항법’이 새롭게 개발된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소설은 구식이 되어버린 우주정거장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우주선을 고집스레 기다리는 이의 사연을 들려주지요. 이 소설의 과학적 모티브는 '어떤 물질도 빛보다 빠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한계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했지요. 많은 과학소설이 어떻게 빛의 속도를 극복할 것인지 다루는 사이, 작가는 ‘초광속 항법’이 개발되었을 때 우리 삶에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상상했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옛 기술은 버려지기 일쑤니까요. 한편 작가는 ‘우주선이 오지 않는 우주정거장’의 모티브를 신문기사에서 얻었습니다. 독일의 어느 버스정류장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데, 요양원의 어르신들이 시설을 나와 길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해가 기울면 버스가 아니라 시설직원이 나와 어르신을 모셔갔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소설은 ‘빛의 속도’라는 과학적 사실과 '버스가 오지 않는 정류장’이라는 일상의 경험을 포개놓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엮어낸 이야기입니다.

 

3. 단편집을 출간한 이듬해 김초엽은 『인지 공간』으로 제1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습니다. 작가는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 뇌 안에서 지도처럼 공간적으로 조직된다는 연구결과를 읽고, 뇌 안의 ‘공간적 인지’를 뇌 밖에서 건축으로 구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건물을 지어놓고 모든 사람들이 가치롭다고 여기는 기억과 지식을 건물에 담아둘 수 있다면, 그런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그려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곳에서 읽고 배우겠지요.

그런데 소설은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 없었던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주인공은 아주 작은 몸집으로 태어났습니다. 터무니없이 작았기 때문에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인지 공간에 들어갈 수 없으니 사람들이 가치롭다고 여기는 지식을 배울 수 없었고, 우주탐사대가 되고 싶다는 꿈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공의 ‘손상’된 신체는 활동의 ‘불능’으로 이어졌고, 다른 사람처럼 학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리’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가는 고백합니다.

 

“요즘 소설 외에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분야는 장애학이다. 장애학에서는 몸의 손상이 장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상과 상호작용하는 사회적 구조가 장애를 만든다고 말한다. 특정한 형태의 몸에 맞추어 설계된 세계가 어떤 종류의 몸을 장애화하는 것이다. 그런 강력한 아이디어를 접한 이후로, 소설 속의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접근 가능한 미래’가 있는지 묻게 된다. 기술이 약속할 미래는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동시에 접근불가능한가?”

 

묻고 싶었습니다. 왜 갑자기 장애를 다루는가? 과학기술의 발달은 장애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왜 김초엽은 장애와 과학을 포개놓고 있는가? 김초엽은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저는 책을 덮으면서 질문도 침묵 사이에 끼워두었습니다. 그 고민은 이듬해 풀렸습니다. 올해 김초엽은 김원영 작가와 함께 『사이보그가 되다』를 펴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몸을 두고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과 기술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니까 김초엽은 후천적 청각장애인이었고 보청기를 하고서야 겨우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장애는 과학처럼 또 다른 삶의 자리였던 셈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청각적 정보가 극도로 절제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아마 이러한 연유였겠지요.

 

4. 김초엽은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신경성 난청을 진단 받은 뒤 이어진 일상에 대해 고백합니다. 값비싼 보청기를 겨우 마련하고도, 남들이 볼까 고민해야 했다는 것. 잘 듣지 못하는 자신에게 친구들이 “야, 너 보청기 해야겠다.”라며 웃을 때 “나 정말 보청기하고 있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 보청기 배터리가 떨어질까, 물에 젖어서 망가질까 전전긍긍해야 했다는 것. 보청기를 하고서도 모든 소리를 깨끗하게 들을 수 없었다는 것….

마침내 어느 어귀에서 김초엽은 학습과 연구의 자리인 대학에서도 장애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음을 고백합니다. 혹시『인지 공간』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었을까요?

영화「사운드 오브 메탈」(2021)을 떠올렸습니다. 주인공은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으로 밥을 벌고, 음악으로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드러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어찌 소리 없는 삶에 적응하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수술을 합니다. 몸에 기계를 심어 어찌어찌 소리를 듣지만 예전처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음악도, 연인의 목소리도, 성당의 종소리도 소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개의 영화는 청각장애를 표현하기 위해 모든 소리를 제거합니다. 그러나 「사운드 오브 메탈」은 청각장애가 생겼을 때 들리는 소리를 재현하면서 주인공이 겪는 장애를 표현합니다. 화면을 마주한 이들은 울림과 이명, 날카로운 기계음을 함께 들으며 겨우 소리의 흔적을 더듬을 뿐 결코 소리를 다시 찾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더욱 이입하게 됩니다. 영화를 마주하고서야 겨우 김초엽이 사는 세계의 막막함을 더듬어 느낍니다.

 

5. 안과에 다녀왔습니다. 집에 돌아와「야곱 신부의 편지」(2009)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눈이 먼 노사제의 그 이야기를 안과에 다녀올 때마다 보았습니다. 투병의 후유증으로 눈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습니다. 읽고 쓰면서 생을 버티는 저에게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것은 큰 공포로 다가옵니다. 그 이후의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누가 좀 속 시원하게 답을 주면 좋겠습니다만, 누가 답을 준들 그 역시 막막하겠지요. 그렇게 다시 김초엽의 소설을 읽습니다. 그가 감각 하나를 잃어버리고서도 기어이 열어젖힌 세계를 온몸으로 지나갑니다. 아마도 하나의 감각이 닫힌 뒤에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으며,그 상상력으로 다른 세계를 열 수 있을 겁니다. 김초엽이 소설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을 건넵니다. 그 문장에 조용히 마음을 걸어둡니다. 눈을 감고 읽어봅니다.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거야.”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그곳에서도 삶은 가능할 겁니다. 그래서 김초엽은 저에게 위로가 됩니다. 김초엽이 과학과 장애를 두고 상상을 포기하지 않았듯, 저도 사제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생각하며 또 상상하겠지요. 도리 없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열릴 세계를 준비해야겠지만 그곳에서도 저는 상상이라는 낱말을 어루만지고 가지고 놀며 말과 글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 너머에서도 저는 옹알거리며 사제의 삶을 고민하며, 친구들에게 내일이 없다는 듯이 농담을 건넬 테지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말과 삶을 나누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그 너머로 상상하며, 그 너머에서도 상상하겠지요. 바로 오늘처럼.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

김초엽, 『인지 공간』,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0, 217-243.

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클라우스 해로, 영화 「야곱 신부의 편지」(2012)

다리우스 마더, 영화 「사운드 오브 메탈」(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