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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無名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월간〈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아름다운 산이나 계곡에 가면 멋진 바위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엔 그런 사람이 없겠지만 과거에는 경치 좋은 곳이나 유명한 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에 새겨진 이름도 있고, 비교적 최근에 한글로 새겨진 이름도 있습니다. 이렇게 남겨진 이름은 환경 파괴, 자연 훼손이라며 두고두고 욕을 먹기 일쑤지만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이름을 남겨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 합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관계 속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공동체 안에서 훌륭한 일원으로 인정받고, 그 이름이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것이야말로 큰 명예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자도 이야기합니다. “군자는 종신토록 이름이 일컬어지지 못함을 싫어한다.” 1) 이러한 유가전통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위대한 일을 해서 이름을 남기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나쁜 일로 악명(惡名)을 남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독재자들은 자신의 업적을 널리 알리려고 동상을 만들어 세우고 곳곳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지만 이렇게 남겨진 이름은 오히려 후손들에게 비난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순서가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이름을 남기려고 업적을 치장할 것이 아니라 업적을 쌓아나가다 보면 이름이 알려지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묵묵히 최선을 다해서 선행을 쌓아 나가면, 그 이름이 잊히지 않고 계속 회자되고 널리 알려지는 것이지요.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세상과 다릅니다. 이름을 남기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워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선행을 실천하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마태 6,4)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선행을 베풀라는 주님의 가르침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신 것이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번지르르하고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 냄새를 풍기는 위선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등에 업고 신자라고, 수도자라고, 사제라고 자기 이름을 앞세우려고 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이름이 빛나고 돋보이도록 노력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순교자 성월입니다. 한국 교회는 103위의 순교 성인과 124위의 복자라는 위대한 신앙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름이 남겨진 순교자들뿐이겠습니까! 이름 없이 순교하신 수많은 무명(無名) 순교자들이 계십니다. 가까운 한티 순교성지를 찾아가도 순교의 흔적은 있지만 묘비 하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산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신앙을 지키다 어떻게 순교를 당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분들의 이름 하나 알지 못합니다. 이렇듯 교회는 수많은 이름 없는(無名)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충실히 하여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 11,11)

 

1) 『논어』, 「위령공」, 20. “子日, 君子疾沒世而名不稱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