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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집이 밥이고 몸입니다


글 황종열 레오 | 평신도 생태영성학자

 

『헨젤과 그레텔』이라고 하는 동화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읽었던 이야기인 “백설공주”를 쓴 야콥 그림과 빌헬름 그림 형제가 1812년에 쓴 이야기입니다. 이 저자는 제가 읽지는 않았지만 결혼한 후 태어난 첫 아이가 읽어달라 해서 읽어 주고 또 읽어 주었던 “브레멘의 동물음악대”같은 동화도 쓴 독일의 작가입니다.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아버지가 새로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 이 새어머니가 아버지를 압박해서 오빠 헨젤과 여동생 그레텔을 숲으로 데려가서 버리고 오게 합니다. 헨젤과 그레텔은 처음에는 집으로 가는 길을 조약돌로 표시해 놓아서 다시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새어머니는 다시 아버지에게 요구해서 남매를 깊은 숲에 버리게 하였습니다. 남매는 아버지를 따라 숲으로 가면서 이번에는 빵 조각으로 길을 표시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숲에 사는 새들이 빵 조각들을 다 먹어서 길을 잃어버린 채 숲속을 헤매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헨젤과 그레텔은 빵과 과자로 만들어진 집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이 집을 먹기 시작합니다. 이 집 주인은 마녀였습니다. 이 마녀는 빵으로 유혹하여 이들이 살이 찌면 잡아먹으려 했습니다. 마침내 마녀가 솥에 물을 끓여 놓고 그 솥에 헨젤을 잡아넣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그레텔이 꾀를 내어 마녀가 솥에 들어가게 만든 다음에 생명을 죽이려던 이 마녀가 나오지 못하게 해서 남매가 살아났습니다. 이들은 마녀 집에 있던 보화를 가져와서 아빠와 계모와 함께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원작 초판에는 친모였다가 개정판에는 계모로 나오고 헨젤과 그레텔이 돌아왔을 때는 계모가 이미 죽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야기를 순화하려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헨젤과 그레텔이 나쁜 뜻과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도 이들이 이런 것들까지 오히려 선으로 갚아가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그분의 살림에 참여해 오면서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그분의 바닥 위에서 자녀들은 부모들보다 언제나 존재 용량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 안에서 뇌 용량의 크기가 증가해 온 생물학적 진화적 사실을 통해서 확인하여 언어화하고 현장에서, 특히 두 아들과 수많은 학생들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크로마뇽인의 뇌 용량이 더 크고 크로마뇽인보다 현대 호모 사피엔스의 뇌 용량이 더 큰데요, 이것은 후대인들의 뇌 용량이 선대인들의 그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부모 세대보다 자녀 세대의 뇌용량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자녀는 부모보다, 그리고 학생은 교사보다 존재 용량이 더 큽니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위에서 진술한 것처럼, 내 마음대로 “이들은 마녀 집에 있던 보화를 가져와서 아빠와 계모와 함께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고 맺은 것이지요.

오늘 이 이야기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이 집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어떠신가요, 여러분은 집을 드셔 본 적이 있으신지요? 집을 어떻게 먹느냐고요? 모든 존재는 집을 먹고 삽니다. 실제로 집이 밥입니다.

예를 들면 배추밭에서 배추벌레를 잡아 보셨나요? 위의 사진을 보아 주십시오. 이 사진은 〈빛〉잡지에 사진 묵상을 나누어 주시는 양병주 님이 보내주신 작품인데요, 배추에 구멍이 나 있는 부분은 배추벌레가 먹어서 배추벌레의 몸이 되었겠지요. 배추벌레에게는 배추가 집이면서 밥이 되고 그러므로 몸이 됩니다. 생명의 형태가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집과 밥과 몸이 바로 이어져 있습니다.

지금도 온 지구와 우리나라를 완전히 휘저어 놓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몸을 집이자 밥으로 삼고 있는 존재입니다. 생명의 형태가 덜 복잡하고 규모가 작을수록 집과 밥과 몸이 하나인 것이 바로 드러납니다.

배추벌레에게 배추가 집이자 밥이자 몸이고, 코로나 바이러스에게 우리 몸이 집이자 밥이자 몸이라면, 우리에게 집이자 밥이자 몸인 것은 무엇일까요?

7월 나눔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지구를 “우리의 공동의 집”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구가 우리의 집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가 우리의 밥도 몸도 되어 주는지요?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성인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집,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지구, 우리의 땅이 “온갖 과일과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여 우리를 길러준다고 말합니다.(『찬미받으소서』 1항) 프란치스코 성인과 교황님의 이런 생각이 과장일까요, 아니면 실재일까요?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9개월 동안 어머니 태중에서 자랍니다. 어머니가 우리를 살게 하는 집과 밥과 몸이 되어줍니다. 그런 것처럼 지구가 우리를 품어주고 길러주는 어머니로서 집이고 밥이고 몸이 되어 줍니다.

오늘의 문명은 집인 지구를 먹어 치우다가 마녀의 죽음의 덫에 걸려든 것 같은 면이 있습니다. 전 지구가 기후변화로 이 여름에 극심한 무더위를 겪으면서 여러 사람들이 말합니다.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이렇게 지구를 파괴하면서 살아서는 안된다고요.

몸을 갖고 있는 모든 존재는 밥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 밥은 집에서, 바닥에서, 땅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몸을 갖고 있는 모든 존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먹게 됩니다.

이제 먹는 데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깊이 성찰하고 이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먹으면서도 먹는 데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깨어있는 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느끼게 됩니다. 신앙공동체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집이 되어 주고 밥이 되어주고 우리의 몸이 되어 주는 지구, 우리의 땅을 돌보면서 하느님의 자녀들로 충만하게 사는 생태 사도들이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이전 방식으로 개발주의에 사로잡힌 존재들로서 마치 마녀처럼 자연 생명과 인간 생명과 사회 생명을 파괴해 온 것까지 하느님의 살림으로 정화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축복을 선물 받으실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늘, 연못, 불, 천둥, 바람, 물, 산, 땅을 만나서 이루는 일들은 어떨까요? 하늘과 하늘이 만난 것을 건건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天)의 아드님(天) 예수님이 하늘을 떠나서 땅의 땅, 곤곤을 향해 나아가십니다. 그리고는 다시 곤곤에서 건건을 향해 움직여 가십니다. 이 과정을 예수님의 탄생과 그분의 그리스도 사건으로 해석해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때가 있었습니다.

하늘(天)이 하늘(天)을 떠나 연못(澤)에 내려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여 기쁘게 하십니다. 이 하늘께서 불(火) 아래에서 불과 더불어 수많은 것들이 있게 하시고(大有) 천둥(雷)을 일으켜 만물이 그분의 살림으로 가득 차게 하십니다(大壯). 이 하늘이 바람(風)을 통해서 모이는 것들이 있게 하시고(小畜), 물(水)을 일으켜 만물이 기다릴(需) 줄 알게 하시며, 산에 내리셔서 많은 것들이 자라게 하십니다.(大畜) 그런 가운데 하늘이 자기를 낮추어 땅 아래에서 만물을 받쳐 주시는 바닥이 되시어 땅에 있는 만물들이 번창하게(泰) 하십니다.

땅으로 내리신 하늘이 흙(地)과 물(澤)이 만나 이어져서 살게 하시고 당신 자신이 땅의 자녀로서 세상과 함께 살기 시작하셨습니다(臨). 그분이 세상을 휘감은 불(地火 ) 앞에서 이집트로 피해 숨으셨으나(明夷), 하늘의 기운이 바닥에서 차오르니(地雷 ) 나자렛으로 돌아오셔서(復) 땅과 함께 되살아나는 기운으로(地風 ) 땅의 백성들 가운데서 당신이 하실 일들을 하십니다(升). 그분은 민중들에게 흙-땅에서 나는 빵과 물(地水 )을 주시며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로 살 길을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며 이들과 하느님의 살림의 길을 함께 열어 가십니다(師). 그러시면서 그분은 산이 땅 아래에(地山 ) 선 듯 자기를 낮추시며(謙), 흙 바닥 맨 바닥으로 자신을 비워 만물을 받으시며(地地 )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존재들을 사랑으로 품어 섬기시고 또 섬기셨습니다(坤).

이 여름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문화적, 영성적 건강을 위해 돌보시는 우리 주님의 자비 안에서 여러분 모두 깊은 평화와 충만을 누리시기를 바라면서 다음 달에 다시 기쁘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