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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 다시 읽기
기억
- 유다서


글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 |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유다서는 ‘전통’을 중시한다.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을 강조한다. “여러분이 다 알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백성을 이집트에서 단번에 구해 내셨지만, 나중에는 믿지 않는 자들을 멸망시키셨습니다.”(5절) 이집트에서의 해방을 주도하신 하느님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 민족을 살게 한 힘이었다. 그 힘은 오롯이 그리스도인의 것이 되었다. ‘기억’은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지금의 삶 자체이기도 했고, 지금의 삶은 과거의 흔적 위에 새로운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오늘 속에 다시 살아 움직인다. 다만 유다서가 환기시키는 기억은 죄다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것이었다. 제 잘못이나 우연으로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만 했던 시간들에 대한 기억은 오랜 시간 날 것 그대로 거칠게 남아있게 된다. 그럼에도 제 잘못에 대한 반성과 그로 인한 고통의 기억은 힘겨우나마 이겨 낼 가능성은 남아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고통의 체험은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벌어진 잘못에서 나온다.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니. 타자의 고통에 대해 도저히, 감히 가늠할 수 없으니. 관계 안에 벌어진 잘못에 대한 기억 안에서는 자아와 타자 사이 고통의 불균형이 상존한다. 그 불균형을 어떻게 견뎌내는가는 늘 숙제로 남아있다.

 

유다서가 말하는 천사들의 타락(창세 6장),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창세 19장), 광야에서의 불평(민수 14장), 그리고 카인과 발라암, 코라의 이야기 등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 앞에 불충을 드러낸 사건들의 기억이다. 이스라엘은 제 정체성을 광야의 야훼 하느님을 통해 형성한 민족이다. 하느님은 종교적 신봉의 대상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이며,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요컨대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느님에 대한 불충은 자신에 대한 거부이자 무시인 셈이다. 하느님이라는 타자에 대한 잘못은 도저히 기워갚기 힘든 반성과 속죄의 고통으로 남아있으나 이스라엘은 그 고통을 자신의 삶에 대한 문제로 끌고 들어와 제 반성이 곧 하느님에 대한 회개임을 고백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충에 하느님은 여지없이 징벌과 훈계로 답하셨다. 유다서는 에녹 1서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 강조한다. “보라, 주님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당신의 거룩한 이들과 함께 오시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저마다 불경스럽게 저지른 모든 행실에 따라, 불경한 죄인들이 당신을 거슬러 지껄인 모든 무엄한 말에 따라 각자에게 벌을 내리신다.”(유다 14~15절. 1에녹 1, 9참조) 유다서의 ‘기억’은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기억인듯 하나, 실은 자신에 대한, 제 잘못에 대한 복기이자 인정이며 하느님으로 제 삶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는 회개다.

 

대개 신앙적 ‘기억’은 신앙인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이해하는 작업을 동반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돌아보고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다듬어 가는 게 신앙의 ‘기억’이다. 그럼에도 신앙적 ‘기억’은 한 개인의 됨됨이의 수준에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제 삶의 열매가 무엇인지(12절), 행여 제 욕망에 허덕이며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16.18절) 되돌아보는 건 개인 수련을 위한 게 아니다. 제 욕망을 탓하며 반성하는 도덕적 수련이 신앙의 일이라면 슬프기도 하고 허하기도 하며, 뭔가 견딜 수 없는 가벼운 기분이 드는 게 사실이다.

어느 때부턴가 종교가 도덕의 관점에서만 사유되고 사용되는 듯하다. 신비니, 영성이나 하는 개념들은 죄다 제 삶의 단아함에 봉사하는 재료로 쓰여진다. 신앙은 제 일상을 꾸미는 탐욕이 아니다. “겁도 없이 여러분과 잔치를 벌이면서 자신만 돌보는 저들은 여러분의 애찬을 더럽히는 자들입니다.”(12절)

 

유다서의 ‘기억’은 타인에 대한 이해며 주님에 대한 순명이다. 신앙의 기억은 하느님을 만나고 지난시간 신앙을 살아온 수많은 이들을 만나는 연결의 작업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왔고 함께 살아있으며 그럼에도 또다시 함께임을 다짐하고 기대하는 것이 유다서의 ‘기억’이다. 그 ‘기억’은 끊임없이 타자와 소통하는 노력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유다서는 미움의 극단에서 자비를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해 주십시오.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에 닿아 더러워진 속옷까지 미워하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베푸십시오.”(유다 23절)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잘못과 그로 인한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잘못과 그로 인한 심판의 무게에 짓눌려 건조하고 거친 삶을 살아내는 게 제 잘못에 대한 응당한 결과론적 처지고 그것이 신앙하는 이들의 도덕적 당위라면, 신앙의 기억은 너무나 외롭고 슬픈 일이 된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잘못을 깨끗이 닦아내어 처세에 무난한 이들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름에도,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사랑을 살고자, 자비를 입고자 겸허히 소망하는 사람이다. 신앙인의 기억은 그렇게 사랑 안에, 자비 안에 쌓여간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십시오.”(21절) 신앙의 기억은 결국 자비에 대한 간구다. 키리에 엘레이손(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크리스테 엘레이손(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