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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칼럼
작심삼일의 무한반복


글 허윤정 엘리사벳 | 통합의료진흥원 전인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별다를 것 없이 어제와 이어지는 듯한 오늘이지만 우리는 하루를 단락 짓고, 한 달을, 한 해를 구분지어 선을 하나 쫘악 긋습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의 시간을 과거로 밀어 넣어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출발점을 찍습니다. 1월은 감사하게도 크고 새하얀 도화지 한 장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 같은 설렘을 가질 수 있는 달입니다. 한 해를 어떤 그림으로 채워 넣으실 건가요? 운동을 하고 살을 빼고 어쨌든 취직을 하고 담배를 끊고 술을 줄이고….

 

아들이 서너 살쯤 되었을 때였을 겁니다. 손가락 사이에 하얀 빨대를 끼워 입에 물고는 햇살 잘 드는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서 “후~~”하며 저를 보고 씨익 웃는 겁니다. 남편은 우리 딸이 말을 하게 되고 담배를 끊으라 하면 그때는 꼭 끊겠다고 했지만 말 잘하는 딸이 둘이나 되는 지금까지도 그 약속은 허공을 맴돌고 있습니다. 의사로서 환자들에게 금연하라는 말을 어떻게 당당하게 할 수 있을까 싶은데 환자들에게는 당연히 금연을 권유한다네요. 원래 의사가 하는 대로 따라하지 말고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오래 산다면서요.

발이 시린 베란다도 금연구역이 된 지 오랜 탓에 추운 겨울 아침에 담배 한 모금 펴보겠다고 쓰레기장 근처 아파트 구석을 찾아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본 지도 벌써 십여 년째입니다. 몇 해 전 겨울 어느 날, 세상을 다 밝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뛰어와서 신세계를 발견한 듯 전자담배를 보여줍니다. 오래전 만화방에서 검은 봉지 한가득 만화책을 안고 나올 때 이후 본 적이 없던 미소입니다. 이젠 베란다에서라도 담배를 필 수 있다는 희망이 중년의 이 남자를 그렇게 환하게 했나 봅니다.

 

흔히 전자담배라고 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배터리에 가열된 니코틴 용액을 기체로 흡입하던 종전의 전자담배와 달리 아이코스로 대표되는 이 담배는 찌는 담배, 가열 담배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2017년 일본에서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가열 담배는 니코틴, 타르의 농도는 일반 궐련 담배와 비슷한 수준이고, 일부 연소로 인해 발생하는 유해 물질은 기존 담배보다 좀 적게 나와서 덜 위험한 담배라고 담배회사는 광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열 담배를 피는 분들이 일반 궐련 담배도 함께 사용하고 있고 유해 물질이 포함되어 있기에 유해 물질 감소가 건강위험 감소 효과와 비례해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남편은 담배 냄새가 나지 않게 나름 노력합니다. 담배를 피고 와서는 섬유탈취제도 뿌리고 손을 씻고 향이 좋은 화장품을 바르기도 합니다만 딸들은 담배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선 근처에도 못 오게 합니다. 지난 여름, 사랑하는 딸들로부터의 박해가 심해지자 금연을 생각하게 되면서 남들에게 처방만 해 주던 금연 약물을 복용하였습니다. 비싼 약도 나라에서 지원 해 준다 하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을까요?

 

금연 클리닉에서 주로 처방하는 약물은 니코틴 의존을 치료하는 것이 중심입니다. 금연으로 인해 생기는 불안감, 금연 욕구, 수면 장애를 비롯한 니코틴 금단 증상은 니코틴 패치, 껌, 사탕 등의 니코틴 대체 약물로 줄여줄 수 있습니다. 주의 하실 것은 니코틴 흡수를 떨어뜨릴 수 있는 커피나 음료수는 니코틴 경구제 사용 전후 10분 이내에는 드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갑자기 흡연 욕구가 있을 때는 니코틴 껌보다 사탕이 흡수가 더 빠르며 입안의 자극감, 딸꾹질, 오심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에 천천히 빨아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니코틴 패치와 니코틴 껌이나 사탕을 병용하는 것이 단일 용법 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또 항우울제로 개발되었으나 금연 효과가 있어 처방되는 약물도 있습니다. 가장 많이 처방받는 바레니클린 제제(상품명 챔픽스)는 3~6개월 정도 복용하는데 초기 사용 시 오심, 불면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나 1주 정도 지나면 점차 사라집니다. 아쉽게도 2021년 여름 경 발암물질 검출 논란에 휩싸이면서 처방이 중단되었습니다. 담배를 핀 지 30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은 금연을 결심하고 약 을 먹어가며 담배를 줄여가던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왜 그때, 어차피 담배도 발암물질덩어리인데….

 

그래도 지금은 하루에 담배 서너 개피밖에 피우지 않는다며 남편은 은근 으쓱해 합니다. 하지만 연소되는 모든 형태의 담배는 흡연량을 줄이더라도 건강에 대한 영향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흡연량을 줄이면 일부 암의 발생은 줄어들지만 총 사망률에는 영향이 없고, 소량의 흡연도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사망을 크게 증가시키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담배도 일종의 중독입니다. 따라서 담배는 줄이는 것이 아니라 끊는 것입니다. 요즘은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에 그 자리를 빼앗겼지만 예전에는 이맘 때쯤이면 다이어리를 사서 형형색색의 볼펜으로 새해 결심을 쓰고 그 실천 과정을 매일매일 적곤 했죠. 다이어리는 항상 1월이 빼곡하고 2월은 조금 빈틈이 보이지만 3월까지는 버텨보는데 4월 이후는 말갛습니다. 학창시절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 영어』의 1장과 어찌 그리 닮아 있을까요?

 

고해소에 들어가 하느님께 아뢰는 저의 죄는 항상 비슷한 레퍼토리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왜 매번 똑같은 죄를 짓고 용서해 달라고 쪼르르 달려가는지 자괴감이 들 때도 많습니다. 용서하시는 건 하느님의 일이고, 죄를 짓는 건 우리 인간의 일일 겁니다. 너무 자책하지 말고 깨끗이 씻어 새로운 선 하나를 긋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죄의 색깔이 옅어지겠지요. 우리의 다짐, 계획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새해의 다짐들 대부분은 어쩌면 지켜 나가기 그리 쉽지 않은 습관일 겁니다. 작심삼일, 혹은 작심 일주일이 되더라도 넘어지지 말고 작심삼일, 일주일의 무한 반복을 하다보면 완벽하진 않더라도 그럴듯한 그림 하나 그릴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