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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축복된 ‘시간(時間)’이여


글 최성준 이냐시오 신부 | 월간 〈빛〉 편집주간 겸 교구 문화홍보국장

 

날씨가 추워지며 연말이 다가오는 요즘이면, 올 한 해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하며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간다는 걸 느낍니다. 우리는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제약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지요. 시간은 매 순간 쉬지 않고 지나갑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은 나이 들고 늙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거대한 우주의 시간 앞에서 기껏 백 년 남짓 사는 우리네 삶은 참 초라해 보입니다. 늘어가는 주름살과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가는 세월의 야속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지 모릅니다. 시간 속에 산다는 것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화란 반드시 시간 개념을 동반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기에 변화가 가능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고, 지금 보는 자연 경관이 십 년 후에는 변하는 것도 시간의 영향을 받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시간을 초월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면 더 이상 변화는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없으니 변한다는 현상도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내가 변화될 여지도 없어집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없고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시간의 제약 속에 살고 있는 ‘지금’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세상을 떠나게 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에 더 이상의 변화가 없는 영원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시편 90,4) 천국과 지옥은 물론 연옥에서도 변화란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없으니까요. 변화와 회개는 이 지상에서의 삶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아직 나에게 변화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11월, 위령 성월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는 때입니다. 교구청 안을 산책하다가 성직자 묘지 입구에 다다랐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라는 라틴어 구절이 보입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고 해석될 수 있겠지요. 죽음이 오늘은 나에게 찾아왔지만 내일은 너에게 찾아갈 것이니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집회서의 다음 구절에서 따온 라틴어 격언이라고 합니다.

 

“그의 운명을 돌이켜 보며 네 운명도 그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어제는 그의 차례요 오늘은 네 차례다.”(집회 38,22)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변화될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은 좀 더 주님께 다가가기를, 오늘보다 내일은 좀 더 사랑 가득한 존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시간이 아직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직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