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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5장, 더 좋은 정치(2)


글 박용욱 미카엘 신부|교구 사목연구소장

 

선행을 베푼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들이 약한 이들을 돕고 도움을 베푸는 일에 남달리 뛰어났다는 기록은 예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2세기 익명의 교부는 그리스도인의 자선활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닮는 것이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닮는다는 것은 이웃의 짐을 받아진다는 것이다. 즉 좀 더 나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 더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1)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살림이 넉넉하거나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기술자들, 늙은 여인들이 있는데, 그들은 비록 교의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베풀고 이웃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선행을 합니다.”2)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가진 바를 나누고 선행을 베푸는 데 탁월하다면, 단순한 계산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경제적 불평등과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겠지요.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늘어서 자선을 더 많이 하면 언젠가 가난으로 고통받지 않는 세상이 올지도 모릅니다.

 

선행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불평등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만 해도 10억 명이 넘고, 정교회와 개신교 등등을 포함하면 무려 세계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그래도 전 세계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그다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자선과 선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재능이 부족했기 때문에,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가난의 굴레를 못 벗는 경우도 있고, 죽어라 노력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할 만큼 곤란한 상황이거나 노력할 의지마저 포기할 정도로 비참한 처지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재능도 있고 노력도 했는데 불의한 사회 구조 때문에 가난에 내몰리는 경우도 있겠지요. 가난의 이유가 다양한 만큼 해법도 다양해야 하는데, 선행과 자선이 해법 중의 하나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어떻게 적절하게 분배해야 할지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는 것 또한 하나의 중요한 해법입니다. 이를 일컬어 ‘정치’라고 하지요.

 

그래서 회칙 「모든 형제들」의 제5장은 ‘더 좋은 정치’를 다룹니다. 교회가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 또한 애덕을 실천하는 중요한 해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더 좋은 정치는 불의와 불평등을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황님은 더 좋은 정치를 가로막는 두 가지 극단이 대중 영합주의(포퓰리즘, populism)와 자유주의라고 보고(154항), 어느 쪽이든 힘없는 이들에 무관심하고 열린 세계를 구상하기 어렵게 하는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좋은 정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십니다. 지난 호에서는 회칙 순서에 따라 대중 영합주의의 문제를 먼저 살펴봤습니다. 이번 호와 다음 호에 다룰 극단은 ‘자유 주의’입니다

 

자유주의라는 극단

자유주의는 대중 영합주의와 짝을 이루는 또 다른 극단입니다. 누구든 억압이나 강제를 싫어하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겠지만 정치와 관련해서 교황님께서 비판하시는 ‘자유’라는 말의 뜻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정치, 경제, 사회윤리 같은 사회적인 맥락에서 자유주의는 개인이 사회에 우선하고, 사회는 개인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서 지켜야 할 공동체적 가치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사회 또는 국가는 중립적 입장을 지키면서 개인의 삶에 대해서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유주의는 기존의 질서, 현재 세계가 전체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고 전제하고, 가난이나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생기는 것을 근본적으로 개인의 탓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최선의 이익을 위해서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노력하는 존재이니까, 정치는 이런 노력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합당한 결과를 얻도록 최소한으로 개입하면 될 뿐이라는 것이지요. 개인과 개인 사이에 누가 무엇을 가져가느냐 하는 문제로 다투게 될 때 이 갈등을 해결하면서 적절한 분배를 이뤄내는 것은 시장(Market)의 역할이라 봅니다. 공산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대결이 공산주의의 참패로 끝난게 자유주의의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곧 ‘시장의 자유’를 말합니다.

 

시장에 순응해 버린 한국 사회

이렇게 공동체적 가치보다 시장의 자유를 우선으로 보는 풍조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졌습니다. 한편으로 무한 경쟁의 피로감을 토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경쟁에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수성을 드러냅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라는 말은 양심이건 염치건 간에 일단 이기고 나서 마음껏 누리며 살자는 뜻이 되었습니다. 없는 사람 생각도 하면서 허세와 낭비를 줄이자고 하면 ‘내가 벌어서 내가 쓰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라는 대답을 듣게 되는 세상입니다. 공동체가 어떻게 되든 내가 시장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패자의 아픔 같은 것은 뒷전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한국 리서치의 ‘2018년 공정성 인식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능력과 노력에 따른 불평등한 분배’를 66%의 지지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 세계 가치관 조사 7차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들이 평등에 찬성한 비율이 12.4%에 불과한데 비해 불평등을 지지한 비율은 64.8%로 타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삶의 질이 향상되고 있는 국가 중 타자에 대한 관용도와 구성원 간의 신뢰가 높아지지 않는 예외적 상황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는 물질적으로 예전보다 풍요해져도 약자의 아픔과 희생은 당연하게 여기면서 불평등을 용인하는 비정한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지요. ‘헛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옛말과 달리 악착같이 제 곳간 늘이는 데만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야수성의 결과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노인 빈곤율, 세계 최저의 출생률로 이어져 급기야 사회의 존망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공동선을 위한 정치

세계는 경제침체의 초입에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어려움 앞에서 좋은 정치를 꿈꾸고 의논해 봐야 할 시점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는 “공동선을 위한 정치, 사람들을 위하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정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사랑과 함께 가는 것이며, 경제체계를 사회적, 문화적, 대중적인 활동으로 통합시키는 정치적 박애주의는 믿는 이들을 통해 가능합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정치가 어떤 내용인지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1)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 10,6

2) 아테나고라스, Legatio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