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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톺아보기
시편 88편, ‘신의 부재?’, ‘신의 일식!’


글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20세기 위대한 종교철학자 중 한 명인 유대인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신은 죽었다’로 대표되는 무신론적 경향에 대하여 ‘신의 일식’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하느님이 숨어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신의 부재’ 혹은 ‘신의 죽음’이 아니라 ‘신의 일식’이라는 참 멋진 말을 한 것입니다.

 

‘일식(日餘)’은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쉽게 말해 ‘해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이 태양의 전부 혹은 일부를 가리는 천문현상에 따라 ‘개기일식’ 또는 ‘부분일식’이라고 일컫습니다. 지구에서 볼 때 지구 - 달 - 태양 순으로 동일선상에 위치할 때 태양이 일정 시간 동안 달에 가려지는 현상입니다. 태양이 달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 하느님께서 숨어계셔 보이지 않는다고 ‘신의 부재’, ‘신의 죽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단지 잠시 숨어계시는 것입니다.

 

시편 88편은 숨어계신 하느님에 대한 대표적인 시편입니다. 150편의 시편 가운데 가장 어두움이 짙고 암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첫 시작에서 ‘구원의 하느님’이라는 호칭만이 전체 시에서 볼 수 있는 한줄기의 유일한 희망의 빛일 뿐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운 시편입니다. 시편의 마지막 역시 ‘어둠’이라는 단어로 끝나는, 어찌 보면 하나의 길고도 긴 ‘통곡의 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탄식의 시편으로 분류 되는 시는 대체로 시작은 탄식으로 하나 일정부분이 지나면 하느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신뢰와 희망으로 끝맺음을 합니다. 하지만 시편 88편은 그 어떤 신뢰나 소망, 서원이나 희망의 확신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비통과 비탄으로만 점철되어 있습니다. 시편 88편의 암울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이 시편의 음악적 기호인 ‘알 마할랏 르안놋’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분명하지만 극심한 고통 중에 부르는 애절하고 비장한 곡조를 뜻한다는 추측이 생뚱맞지는 않아 보입니다.

 

시편 전체 가운데 가장 처절한 상황을 노래하는 시편 88편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 저녁 기도 시간에 낭송됐습니다. 철저한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전히 버림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이 시편의 내용에 꼭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시편은 처연한 욥의 기도와 처절한 예레미야의 애가에 비견할 만하다고 이해되어 왔습니다

 

시편 88편의 저자는 자신이 겪는 고통을 토로는 하지만 그 이유나 원인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영혼이 깊은 어두운 밤을 겪고 있다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죽음의 세계에 빗대어 드러낼 뿐입니다. 시인은 죽음의 세계를 네 문장마다 각각으로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그는 죽음의 세계를 ‘저승’, ‘구렁’, ‘무덤’, ‘깊은 구렁’, ‘어둡고 깊숙한 곳’, ‘멸망의 나라’, ‘어둠’, ‘망각의 나라’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세계의 특징과 더불어 하느님의 특성을 대조시키기도 하는데 ‘자애’, ‘성실’, ‘기적’, ‘의로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한 12-13절에서는 죽음의 세계의 특성 네 가지와 하느님의 특성 네 가지를 서로 대구(對句)하여 표현하며 하나의 쌍을 이루도록 구성하고 있습니다.:

 

알려지겠습니까?(12-13절)

무덤에서

당신의 자애가

멸망의 나라에서

당신의 성실이

어둠에서

당신의 기적이

망각의 나라에서

당신의 의로움이

 

시인은 하느님의 권능에 대하여 질문하는 형식을 취하며 죽은 이들은 주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드러냅니다. 시인은 살아 있지만 사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이 죽음의 세계에 버려졌다는 사실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 하느님께 있다는 표현입니다. 시인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심적 고통은 ‘하느님의 숨어계심’입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공포 한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을 찾으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88편에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이나 찬양하겠다는 약속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내롭게 어둠의 시간을 견디며 ‘신의 부재’가 아닌 ‘신의 일식’을 믿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는 시(時)도 있지 않습니까? 어려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시편 저자는 직면한 거친 상황에서도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이라고 나지막이 되뇌며 우직한 모습으로 숨어계신 하느님 앞에 서 있습니다. 울음이 터질 듯한 애처로운 목소리에 묻힌 시인의 고백이 응답 없는 하느님께 가닿음을 압니다.

 

때때로 우리 역시 ‘신의 일식 시대’를 살아가야만 합니다. 응답이 없으신 하느님 앞에서 좌절하기보다 시편 저자처럼 ‘주님, 제 구원의 하느님’을 읊조리며 마음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나날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