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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생태 영성 살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태 살이와 생태적 순명’


글 황종열 레오|평신도 생태영성학자

 

10월 4일 우리 교회가 함께 기억한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쯤 태어나서 1226년에 아시시에서 돌아가신 이탈리아 출신 성인이십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분의 이름을 자신의 교종명으로 선택하실 만큼 성인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9월 1일 창조 시기를 시작해서 이 성인의 축일에 창조 시기를 마쳤는데요, 오늘은 이 성인의 생태 살이와 생태적 순명의 거룩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을 부인 삼고 온 자연을 가족 삼아 사신 하느님의 사람이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찬미받으소서」 머리말에서 이 성인의 영성과 삶을 소개하면서 “그분은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소박하게 사셨”다고 말하십니다.(10항)

그런데 이 성인은 그토록 사랑으로 사람과 자연 만물을 대하면서도 ‘주님을 향한 순응’을 위하여 사람과 자연 만물에 종속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어느날 아침에 자기가 버들가지로 만들던 바구니를 태운 적이 있었습니다. 동료 레오 수사가 다가가서 보고는 실베스테르 수사가 바구니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데, 혹시 마음에 안들어서 그러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가 답하였습니다. “너무 잘 만들어졌지요.” “그런데 왜 태웁니까?” “그건, 좀 전에 삼시경을 바치는데 이 바구니 생각에 분심이 들어서요. 이걸 주님께 희생으로 바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엘르와 르끌레,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수녀회역, 『가난한 이의 슬기-프란치스꼬 이야기』, 분도출판사, 2005, 116) 그리고는 이렇게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일하지 않는 공동체보다 한심한 건 없습니다. 그러나 레오 수사님, 일이 전부가 아니고 일로써 모두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일이 인간의 자유에 멍에가 될 수도 있습니다. 흔히 인간은 자기 일에 빠져, 하느님을 잊게 됩니다. 그러니 묵상을 소홀히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드시는지요? 성인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구니를 아무렇게나 만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일을 충실하게 하고 바구니도 온 정성을 다해 잘 만드십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께 충실하게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을 충실하게 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일이 기도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기도만 방해받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잘 되지 않고 오히려 일의 질이 떨어지게 됩니다. 하느님께 충실한 그 열정으로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일이 충실해지지만 하느님께 충실하지 못할 경우 사람에게도 일도, 특히 어렵거나 힘들 때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신의 이같은 이해를 히브리 백성이 맏물을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것과 연결지으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법, 곧 기술이나 개발, 혹은 산업의 결과물에 사로잡히지 않을 영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 중요한 것은 주님께 희생을 바칠 마음의 준비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인간은 순응성을 가지게 됩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인간은 추수의 맏물과 가축의 맏배로 하느님께 희생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하느님께 기꺼이 바쳤던 겁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배 행위고, 자유로운 행위입니다. 인간은 영혼을 열고 희생을 바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위대함이요, 자유의 비결입니다. 자기가 만든 바구니 하나, 잘 만들어진 바구니 하나 태우는 게 대숩니까? …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 역시 남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의 종인 인간은 위험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기의 사업에 집착하게 되면 이 사업이 삶의 중심이 되어 순응성을 앗아가게 됩니다.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다스림(basileia tou theou: 하느님의 살림)을 마몬(mammon: 재물)에 굴복시키지 않을 정신, 곧 ‘영의 가난’을 통하여 생성되고 보존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마태 6,19-21. 24)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하느님의 다스림에 대한 깊은 순명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추구했던 이같은 영의 자유는 순명에서 샘솟고 순명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인간 사이의 순명을 하느님께 대한 순명에 이어 놓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온 창조물과도 이어 놓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장상에 대한 순명을 자기 영혼에 대한 순명과 복음의 영에 따라 마련된 회칙에 대한 순명, 그리고 회칙이 지향하는 공동체의 충만을 향한 순명과 연결짓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순명과 통합시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순명을 사람 사이의, 그리고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일로 한정짓지 않습니다. 그는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 가운데서 ‘거룩한 순종’을 찬양하며 노래합니다.

 

“순종은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가축과 야수들에게까지 복종케하고 그들 수중에 있게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주님이 하늘에서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이것들은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성 프란치스꼬와 성녀 글라라의 글』, 작은형제회 한국관구역편, 분도출판사, 2004, 184)

 

프란치스코는 가축과 야수들에게 순명할 때 동물이 “주님이 하늘에서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사람에게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물이 마음대로 하는 기준은 ‘주님이 하늘에서 허락하시는 한도’입니다. 하늘을 따름, 곧 순천(順天)을 기준으로 동물 뜻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프란치스코는 순명을 통하여 우주 만물과 사람과 하느님을 하나로 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순천하는 동물에 대한 이 깊은 신뢰가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온 생태계의 친구요 주보 성인이 되게 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프란치스코 성인은 구삐오라고 하는 한 마을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던 늑대를 찾아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자연 순명을 아름답게 증거합니다. 사람들은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선함으로 동물조차도 말을 듣게 했다면서, 그의 신통력을 찬양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이 일화는 프란치스코가 늑대로 대변되는 야수에게까지도 어떻게 순명하는가를 보여준 거룩한 사례입니다. 늑대에게 귀를 기울인 프란치스코는 늑대가 주림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전달받게 됩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늑대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다리를 놓습니다.

서구어에서 ‘순명(obedience)’이라는 말은 ‘듣다(ob+audire)’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ob은 ‘기울인다’는 뜻을 갖고 있고, audire는 ‘듣는다’를 뜻합니다. 말 그대로는 ‘귀를 기울여서’ 혹은 ‘다가가서 몸을 기울여서’ 몸과 마음과 영을 다해서 ‘듣는다’를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순명(順命)’은 하느님에게서 온 존재에 대한 ‘존재의 응답’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늑대에 대한 이같은 귀기울임과 자신의 중개를 통하여 늑대의 말에 귀기울인 마을사람들, 곧 사람들의 순명을 통하여 늑대의 평화(먹거리 나눔: 벼末 + 입 = 화和)를 발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평화에 이른 늑대가 하느님의 뜻 안에서 프란치스코와 마을 사람들이 바라는 생명 살림에 응답하는 순명으로 마을의 평화를 발생시킵니다. 늑대로 상징되는 자연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순명, 곧 순연(順然), 즉 ‘생태적 순명’이 프란치스코와 마을 사람들에 대한 늑대의 순종(順從), 곧 순명(順命)을 낳으면서 하느님의 뜻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위대한 ‘서로 지킴’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태양의 노래’를 우리 교회와 인류 사회에 유산으로 남겨 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같은 하느님 순명과 자연 순명의 기초 위에서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러한 전통을 오늘 우리 교회에서 새롭게 활성화하기를 바라면서 「찬미받으소서」를 교회와 세계 시민 공동체에 선물해 주시고 마몬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와 자연에 귀기울일 줄 아는 깊은 생태적 순명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이 자유와 순명이 살아날 때 비로소 세계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어 우리에게 존재의 바닥이 되어주는 은총의 통로로서, 참으로 ‘감사와 찬미로 관상해야 하는 기쁜 신비’가 될 것입니다.(12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