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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회칙으로 배우는 사회교리
제8장, 세상의 형제애를 위하여 봉사하는 종교


글 박용욱 미카엘 신부|교구 사목연구소장

 

모든 이를 위해 열린 교회

독일 라이프치히를 대표하는 명소를 꼽자면, 바흐가 오르간 연주자 겸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했던 토마스 교회와 니콜라이 교회가 있습니다. 토마스 교회에는 바흐의 묘소가 있어 참배객들이 줄을 잇지만 니콜라이 교회에는 훨씬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옵니다.

‘모든 이를 위해 열린 교회’(독일어: Offen fuer Alle)를 표방하는 이 교회는 1980년대 평화를 갈망하는 동독의 젊은이들에게 성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1982년 9월부터 이 교회에서 촛불 기도회가 시작되어 가톨릭과 개신교를 가릴 것 없이 매주 월요일 오후 다섯 시에 범교파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결국 이 기도회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독일 통일의 시금석이 되었고, 촛불 기도회의 슬로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이사 2,4)는 정치적 격동기 내내 그리스도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민주화를 갈망하던 동독 국민들에게 비폭력과 평화의 가치를 실천하게 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촛불 기도회가 시작된 1982년부터 통일이 이루어진 1990년까지 일어난 변화를 ‘평화혁명’(Die Friedliche Revolution) 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도 니콜라이 교회는 ‘모든 이를 위해 열린’, 또 ‘칼을 쳐서 보습으로!’라는 평화혁명의 정신에 따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생태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순례지요 정신적 요람으로 큰 역할을 하고 있지요.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데 이바지하는 교회

개신교 예배당 이야기를 길게 쓴 이유는 「모든 형제들」 회칙 마지막 장 ‘세상의 형제애를 위하여 봉사하는 종교’가 지향하는 교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 주는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인구 50만의 도시에 세워진 한 작은 교회가 평화의 성지로서 세계사적 역할을 수행했다면, 전 세계적 조직을 자랑하는 가톨릭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교회가 “인류와 보편적인 형제애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힘을 쏟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십니다. “우리는 섬기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삶에 동행하고 희망을 지지하며 일치의 표징이 되고… 가교를 만들며 벽을 허물고 화해의 씨를 뿌리고자 집밖으로, 성당과 제의방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모든 형제들」 276항)

 

궁극적 토대

이렇게 교회가 세상의 형제애를 위하여 봉사하고 평화와 인권의 보장을 위해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은 어떤 장벽도 뛰어넘게 합니다. 그래서 회칙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분께 열려 있지 않으면 형제애를 호소할 공고하고 확실한 명분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272항)

오늘날 교회 밖에서도 인권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수많은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을 위해 소중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목소리들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 어느 하나 일리 없는 것이 없고, 모두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진리의 한 단편을 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중한 목소리들이 때로 사람들 사이에 젠더 갈등, 세대 갈등, 계층 갈등, 도농 갈등, 종교 간 갈등, 지역 갈등과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입니다. “계급, 어떤 대중 집단, 민족의 이익은 필연적으로 이들이 서로 대립하게 만듭니다. 만일 초월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권력의 힘이 우세해지며, 각자는 다른 이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과 자기의견을 관철하고자 가지고 있는 수단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 듭니다.”(273항)

각자의 목소리가 아무리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 몫을 따져 받겠다는 사람들만 있으면 갈등을 피할 수 없지요. 이 갈등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길동무이고 참형제자매임을 깨달을 때 극복된다는 것이 「모든 형제들」의 주장입니다.

 

그리스도인 정체성

같은 맥락에서 “교회는 하느님께서 다른 종교들 안에서 이루어 주시는 활동을 소중히 여기고,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습니다.”(277항) 우리 교회는 다른 종교들과 경쟁하고 각축을 벌이는 세상의 수많은 집단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인간 존엄과 형제애의 원천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찾으며 “모든 이가 부름받은 보편 친교”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277항)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종교가 “중요한 것들을 매우 많이 공유하고 있기에, 평온하고 질서 정연하고 평화로운 공존의 수단을 찾을 수 있고, 우리의 다름을 받아들이며, 우리가 한 분이신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라는 사실에 기뻐한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279항) 우리 교회는 “온전한 친교를 향한 여정에서도 이미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함께 증언할 의무가 있습니다.”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의 정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 이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고, 증오를 담아 두는 것이 아니라 이를 떨쳐 버리며, 새로운 장벽을 더 높이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길을 열어 나아가면서, 각자 평화의 장인이 되라고 부름받았습니다.”(284항)

 

모든 이의 형제인 그리스도인

이렇게 해서 한 해 동안 「모든 형제들」 회칙이 담고 있는 사회교리의 얼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말하듯 그리스도교의 사회교리는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이루고 증오를 떨치게 하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사실 사회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가족이나 친지 사이에도 불화와 반목이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정치나 사회 문제는 차라리 피하고 싶은 대화 주제가 되어 버린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함께 이야기하지 않고는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지요. 사회교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는 우리 자신이 먼저 모든 이의 형제로서 합당한 자세를 지니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복자 샤를 드 푸코의 모범을 제시하시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모든 이의 형제’가 되려는 이상이 일으켜지기를 기도하십니다. 한 해 동안 함께 「모든 형제들」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이 “모든 영혼의 형제”(287항)가 되려는 소망을 품으시길 저 또한 기도드립니다.

 

다음 호부터는 교구 사목지침에 따라 친교의 해를 살기 위해서 필요한 성찰을 사회교리의 관점에서 풀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