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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대구대교구 순교자 현양 기행문 공모전 ① - 대상
하느님을 알린 사람들의 뜨거운 발자취를 따라서


글 임유림 보나|현풍성당

 

“우와! 드디어 출발이다!”

청명한 공기와 다채로운 색으로 바뀐 나뭇잎과 함께 가을이 찾아왔다. 오랜 기다림 끝에 우리 현풍성당 주일학교 학생 33명과 보좌신부님, 선생님들은 10월 29일 토요일, 대구 시내에 있는 성지를 순례하러 갔다.

설레는 마음을 품고 간 첫 번째 성지는 ‘성모당’이다. 성모당에서 우리 성당 학사님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교구 성지안내봉사회 선생님을 따라 순례를 시작했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을 중심으로 기도하시는 신자분과 따뜻하게 비치는 햇살 덕분에 성모당이 매우 포근하고 성스러웠다.

성모당은 프랑스에서 오신 플로리안 드망즈(한국명 : 안세화) 주교님이 건축하셨다. 안세화 주교님은 한국에 선교하기 위해 오셨을 때 성모님께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을 짓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다. 이 세 가지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면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마시비엘 동굴과 똑같은 동굴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 이후 1918년에 성모당을 완공했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1911 EX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라는 문구가 성모당 위쪽에 적혀 있다. ‘1911’은 세 가지 소원을 빈 날짜, ‘1918’은 성모당을 완공한 해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과의 서원에 의하여’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1911년은 일제 강점기로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 당해 고통받는 시기였다. 돈이 매우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이었을 텐데 성모님께서 기도를 하느님께 전해 주지 않았으면 성모당과 신학교, 주교좌성당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모당을 떠나기 전 성직자묘지에서 사제를 위한 기도를 드린 후 관덕정 순교기념관으로 이동했다.

관덕정순교기념관은 중구 남산동에 있으며 과거에는 죄수들을 처형하던 처형장이었다. 하느님을 따르던 천주교인들도 이곳에서 순교했고, 지금은 순교자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되었다. 입구에는 성 이윤일 요한 동상과 순교 복자 기념비가 있다. 우리는 관장 신부님의 실감나는 설명을 들으며 순례했다.

성 이윤일 요한은 대구대교구 제2주보 성인이시다. 천주교인 집안에서 태어나 공소 회장으로 외교인들을 천주교로 입교시키며 신자들을 잘 이끌었다고 한다. 천주교 박해 때 갇혀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배교의 유혹을 이겨내셨다. 결국 1867년 1월 21일 관덕정에서 순교했다. 이후 성인의 유해는 여러 곳으로 이장되었다가 몇 사람의 증언에 의해 무명 순교자묘역에 묻혀 있는 성인의 유해를 밝혀냈다. 성모당 제대 밑에 안치되었다가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봉안됐다고 한다. 이윤일 요한 성인의 꿋꿋함이 존경스러우면서도 마음이 복잡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라면 성인들과 순교자들처럼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동상과 스테인드글라스 등 이윤일 요한 성인이 등장하는 모든 작품에 항상 십자가가 같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함께 있는 십자가는 이윤일 성인의 무기이자, 우리에게도 주님과 함께하라고 말하는 것 같아 마음이 벅찼다.

관덕정 지하 성인유해현시실에는 성 이윤일 요한을 비롯한 36명의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직접 유해 앞에 서니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는 관덕정 누각에 올라가 단청에 빛, 처음과 끝, 예수 그리스도 등을 상징하는 다양한 문양을 찾아보았다. 알록달록하게 그려져 있어 즐거움이 묻어났다. 누각에서 문양을 보니 전통과 현대를,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조화로운 느낌이었다. 조선시대는 신분 사회여서 양반과 천민, 남녀 차별이 심했는데 하느님 말씀은 “모두가 평등하고 서로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어서 ‘기쁘게 하느님을 알리며 순교를 받아들이신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웠던 마음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조금은 시원해졌다.

점심을 먹은 뒤 주교좌 계산성당으로 가는 길에 이상화 거리에 들렸다. 이상화 거리에는 이상화 시인의 고택과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민족운동가의 고택이 있다. 이상화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로 유명한 민족 저항 시인이다. 서상돈은 고조할아버지부터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여 박해를 피해 다니며 살았다. 특히 큰아버지 서인순은 병인박해 때 감옥에 갇혀 먹을 것이 없어 피고름이 묻은 멍석을 뜯어 먹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킨 분이었다고 한다. 나였으면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배교했을 텐데 서상돈은 가문에서 순교하신 분들을 보며 신앙생활을 더욱 열심히 했다. 그 이후 거상이 된 서상돈은 대구대교구청 일대 1만 평 규모의 땅을 기부하고 주교좌 계산성당 건립 등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도 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습이 위대하고 존경스러웠다.

드디어 마지막 성지인 주교좌 계산성당에 도착했다. 주보성인이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인 주교좌 계산성당은 프와넬 신부님이 고딕 양식으로 설계했다. 성당 기둥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조각되어 모든 곳이 성스럽고 웅장해 성당 안에 들어가니 중세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사에 참례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우리는 본당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주교좌 계산성당을 마지막으로 대구 내 성지 순례를 마쳤다.

나는 성지 순례를 다녀오기 전에는 하느님과 성인과 성지에 대해 잘 모르는 평범한 6학년 아이였다. 하지만 성지 순례를 다녀온 후에는 하느님의 말씀, 순교자들의 마음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게 됐다.

“나는 순교하러 간다. 너희도 따라오너라.” 이윤일 요한 성인의 말씀처럼 꼭 목숨을 다하는 순교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좋은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알리는 사람이 되겠다.

* 이번달부터 2022년 대구대교구 순교자 현양 기행문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 7편을 차례대로 소개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