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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의 해를 위한 생태영성
다시!


글 송영민 아우구스티노 신부|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국장

 

‘싱 어게인’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한때 유명했지만 지금은 대중에게 잊힌 비운의 가수나 세상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무명 가수에게 다시 노래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무대에 설 수 없었던 이들에게 ‘한 번 더’라는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신인을 발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재기를 위한 무대라는 점에서 일종의 패자부활전인 셈입니다. 잘 안된다고 실망하고 포기했던 가수들이 무대에서 ‘다시 노래 (Sing Again)’하며 희망을 되찾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이더군요.

실수나 실패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다시’라는 말은 따뜻하고 희망적으로 들립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가사를 잊어버려 당황하고 있을 때 ‘괜찮아! 다시 해’라고 응원하는 이들처럼, 엉망으로 쓴 시험 답안지 앞에 고개 숙이고 있을 때 새로운 종이를 건네주며 ‘다시 써 보렴’ 하고 말하는 선생님처럼,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조금 더 기다려 보는 여유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다시 노래할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면, 사람들이 어려운 상황에 쉽게 낙담하거나 포기하지는 않겠지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겠지요.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진 것을 보시고 사람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십니다. 그러나 의롭고 흠 없는 노아를 보시고 그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기로 결정하십니다. 홍수의 심판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방주를 통하여 인류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더 이상의 가능성이 없는 ‘마침표’ 대신 다시 해 보라고 ‘쉼표’를 찍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일의 한 단면만을 보고 너무 쉽게 ‘끝(end)’이라고 말하지만, 하느님은 ‘그리고(and)’ 하며 계속해서 구원의 섭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 4월에 경축하는 예수님의 부활도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우리 주님은 ‘끝(end)’이라는 상황을 ‘그리고(and)’가 되도록 반전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내십니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에겐 ‘그다음’이 있음을, 허무하게 끝나지 않고 ‘다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런 점에서 부활은 “again(다시)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다 소용없어’ 하고 낙담할 때, ‘다시(again)’하며 새로이 시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생태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뭐라도 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실망하고 답답해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가끔씩 듣습니다. 기후 변화는 인류가 당면한 실존적 도전인데,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변화는 너무나 더디니 미래가 암울하게 보인다고 하시더군요. 사실 우리가 직면한 상황은 분명 좋지 않습니다. “인류는 기후 변화와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는 유엔 사무총장의 경고가 시사하듯이,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지표는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후 변화를 막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비관적인 전망에 맞서 「찬미받으소서」 회칙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최악의 것을 자행할 수 있지만, 또한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정신적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여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시 선을 선택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05항)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 말씀이 저에겐 마치 ‘다시 노래 부르자.(Sing Again)’는 초대처럼 들립니다. 하느님께서 슬픈 마침표를 찍지 않듯이 우리 역시 변화의 가능성을 믿으며 다시 새롭게 도전한다면, 언젠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

어쩌면 진정한 변화는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않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정말 가능할까?’ 때론 확신이 서지 않겠지만, 그때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다짐해 봅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