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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가르며 대구를 출발한지 2시간 여만에 괴연동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3정승이 난다, 큰 사람이 머무른다’는 뜻을 담고 있는 괴연동 마을에 자리한 괴연공소는 신앙의 박해 속에서도 옛 선조들이 숭고한 정신으로 지켜온 깊은 신앙의 뿌리가 내려진 곳이다.
미사 시작 한 시간 전, 고요함이 흐르는 공소 밖과는 달리 공소 안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오신 할머니들의 말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낯선 이의 등장에 호기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던 할머니들은 “처음 보는 얼굴인디…”, “어디서 왔소?”라고 물었다. 그렇게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어느새 미사 시작 30분 전을 알리는 타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괴연공소 연혁
1800년대 용연동 골짜기에 있었던 공소방은 도요지(도예)를 팔러가는 보부상들이 밀양, 청도를 오가는 길목에 자리했다. 박해가 심하던 때, 선교를 할 수 없지만 알게 모르게 선교가 된 자리로 충청도 등 타지에서 박해를 피해 피신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故(고) 박동준 신부의 아버지인 박봉일(베드로) 형제가 1900년대 자신의 집과 사비를 털어 새로이 공소를 마련하여 포교로 교우를 모았다고 전해진다.
외국인 신부들의 왕래가 있었으며, 1951년 보급물품 때문에 일순 교세가 확장되어 100명이 넘는 신자가 있기도 했지만 점차 그 수가 줄었다. 현재의 공소건물은 옛 공소를 허물고 폐교를 뜯어서 공소로 사용하다가 2000년 어느 독지가의 도움으로 마련됐다.
외지인과 젊은이를 좀 처럼 볼 수 없어 금방 표가 난다는 석종수(요한) 회장은 “우리 공소는 대부분 구교우로 70대부터 최고령이신 93세 할머니, 젊은이(?) 50-60대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며 “옛부터 지리적으로 산새가 험해 들어오기도 나가기도 쉽지 않은 곳이었다.”고 들려준다.
깊은 산골, 문명의 기기가 보급되기 전, 호롱불로 밤을 밝혀야 했고, 시계가 없어 시간을 가늠하기 힘들었던 그 시절, 삼종시간을 알리는 공소의 타종 소리에 의지하며 삶을 꾸려온 선조들의 슬기와 지혜가 엿보이는 곳 괴연공소는 50여 명의 신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매주일 오전 10시 미사가 봉헌된다. 또 감실이 모셔져 있어 언제나 성체조배가 용이하고, 신부가 상주하고 있어 고백성사 또한 자유로이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레지오마리애 2팀, 소공동체 1팀의 활동과 평일미사가 봉헌된다. 석종수 회장은 “어르신들이 너무 열심히 미사에 참례한다.”며 “높은 연령대에도 불구하고 우리 공소는 늘 활기에 차 있고, 본당의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신앙 안에서 한 형제, 한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전했다.

공소에서 강의나 기타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는 지하실 강당에는 선조들의 손떼 묻은 신앙관련 자료, 성모마리아 상본, 1603년경의 천주신리 등이 액자에 담겨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15년 동안 공소회장을 맡았던 이항봉(야고보) 형제는 “신앙에 관련된 자료를 스크랩하여 정리해 놓은 것으로 공소 역사에 관련된 자료들은 故 박봉일 형제의 증손자가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괴연공소와 인근 지역의 공소와의 관계에 대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좀더 세밀하게 들려주었다. “우리 공소의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신광공소와 구룡공소는 박해를 피해 산꼭대기로 들어간 신자들이 박해가 끝나고도 다시 용연동 공소방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활동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2월부터 괴연공소 신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김동기(마카엘) 신부는 “우리 괴연공소 신자들은 신심 좋고, 따뜻하고, 순박하고, 배울 점이 참 많다.”며 “일상 안에서 늘 기도로 생활하며, 그 기도가 자신을 위한 기도라기 보다는 주위의 이웃들을 위한 기도로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신자들.”이라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선조들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과 자신들이 갈고 닦은 신앙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된 삶을 살아가는 괴연공소 신자들은 아늑한 공소에서 서로 마주보며 정을 나누고, 신앙 안에서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며, 그분이 주신 사랑과 은총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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