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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7일 삼위일체 대축일 : 마태 28,16-20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자살한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는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갈릴래아의 어느 산으로 올라갔다. 이방인들의 지역인 이곳은 구원의 빛이 비칠 것이라고 예언된 곳이다.(마태 4,15-16)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고 온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주권에 참여하는 주님으로 제자들에게 임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을 뵌 열한 제자 중에는 그분을 경배한 이들뿐 아니라 아직 믿음의 눈을 뜨지 않아 그분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라고 이르셨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고 그분의 모든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생활지침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공리에 사명을 이행하도록 세상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래서 교회와 7성사가 구원을 위한 유효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에서 성령은 아직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자립존재로 여겨지지 않고 하느님의 권능을 가리킨다.(마태 3,16-17)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거행되는 세례양식은 훗날 니체아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년)에서 신학적으로 정립된 삼위일체 교리를 예고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삼위 일체 교리가 정립되지 않았다.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묵상 : 자신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만이 제일 귀한 존재라고 여긴다. 그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나’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참된 대화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가 사는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 이와 달리, 다수의 공존을 위해 법과 합리적 사고방식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이다. 그가 제일 많이 사용하는 낱말은 ‘우리’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라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사유화하고 집단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부분적인 정의밖에 세우지 못한다.
‘나의 세계’나 ‘우리의 세계’말고 제3의 다른 세계가 있다. 이는 상대방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의 세계,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세계, 꼴찌가 첫째 되고 죽어야 살 수 있는 세계, ‘너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는 각자가 이웃인 ‘너’를 위해 존재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사랑으로 흘러넘치는 세계를 만드셨다. 이 세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각기 자신을 봉헌하며 서로 모든 것을 받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세계이다. 오로지 이 세계에서만 생명과 사랑과 기쁨과 행복이 있다. 예수님은 목숨을 바쳐 아버지와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생활양식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생활양식을 본받아 ‘너의 세계’에서 살면 이미 하느님의 왕국에서 사는 것이다. ‘나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를 박차고 나와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과 이웃과 대화관계를 보존하고 사랑으로 흘러넘치는 풍요로운 인격을 갖추려고 애를 써야 하겠다. 우리의 한 평생은 부활하여 삼위일체 하느님의 품속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준비를 하라고 하느님이 주신 기간이다. 이런 뜻에서 날마다 성호경을 바친다.
6월 14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마르 14,12-16.22-26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2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26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1200년 전쯤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과월절 음식을 들고 계셨다. 그분은 빵을 들어 축복하고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며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라고 말씀하셨다. 빵의 물질적 성분은 변하지 않지만 빵은 예수님의 의도에 따라 실제로 그분의 몸으로 변하고(‘실체변화’) 그분 자신을 의미한다. 이 몸은 이튿날 십자가에 처형되실 몸이다. 또 ‘받아라.’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하고 당신을 선물로 내어주시는 사랑을 체험하라는 호소이다. 예수님은 이제 빵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그들과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맺으신다. 예수님이 빵 안에 현존하신다는 근거는 그분의 말씀이 반드시 실현된다는 데 있다.
예수님은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진 몸으로 사람들을 당신의 몸 안으로 모아들이고 우리를 서로 사랑으로 일치하게 하신다. 성체는 우리를 먹이고 키우는 천상 음식이다. 우리는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제2의 그리스도로 변한다. 우리 안에 임하신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우리의 삶을 사시는 주님이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사랑을 가득 채워 사랑의 봉사를 하라고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 이처럼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시는 때는 교회가 창조되는 순간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돌려가며 마시게 하신 포도주 잔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완전히 봉헌하여 쏟으실 피의 잔을 상징한다. 제자들은 같은 잔에 들어 있는 포도주를 마셔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했다. 그들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 왕국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포도주 잔의 의미를 ‘내 계약의 피’라고 이르셨다. ‘내 피’는 ‘내 몸’처럼 예수님 자신을 뜻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새 계약(예레 31,31-34)을 맺어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을 얻게 해주신다.
양심과 사랑을 무시하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독가스처럼 예외 없이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파괴하고 신용할 수 없는 인간으로 만든다. “거짓말쟁이에게 주어지는 최대의 벌은 그가 진실을 말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다.”(탈무드) 악인은 타인을 해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해친다.(성 아우구스티노) 속죄해야 죄의 독소를 없앨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속죄할 수 없다.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영원히 죽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다. 고맙게도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치러야 하는 죗값을 대신 갚아 주셨다. 예수님은 미사 때마다 당신의 속죄죽음을 재현하신다.
우리가 속죄하는 뜻으로 고통과 불행을 겪으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힘입어 자신과 이웃과 이미 죽은 이들을 위해 속죄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병자들이 세상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뜻에서 고통을 받으면, 그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연결되어 속죄의 힘을 낸다. 그들을 존경하자. 남편은 아내의 죄를, 아내는 남편의 죄를, 부모는 자녀의 죄를, 자녀는 부모의 죄를 대신 속죄해야 하겠다. 부모님, 부부, 자녀들, 스승, 은인, 친구들이 우리에게 숫돌과 같은 구실을 해주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숫돌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고통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에서 나오는 구원에 힘입어 죄와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이웃에게 자유를 전해주는 역할을 한다.
술과 담배를 끊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덜 먹는 것도 속죄하는 좋은 방법이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고통을 받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자. 우리는 수많은 눈물로 사람이 되어간다. 우리는 속죄의 고통을 겪음으로써 정화되고 강인해지고, 남의 고통을 이해하는 힘을 얻으며, 남을 행복하게 만든다.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 마르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필자는 1979년 여름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수학하는 동안 갈릴래아 호숫가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후 늦게 갑자기 폭풍우가 한 시간 정도 호수 위를 휘몰아쳤다. 그러다가 호수가 갑자기 쥐죽은 듯 고요해지는 것을 체험했다. 오늘 복음에 기록된 대로였다.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 호수 동쪽의 높은 언덕에 부딪쳐 호수에 소용돌이와 폭풍을 일으키곤 한다. 예수님은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기적(마르 4,35-41)으로 하느님의 왕권이 실현됨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저녁에 군중을 남겨두고 갈릴래아 호수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계셨다. 그때 갑자기 큰 폭풍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들이쳤고, 배는 이미 물로 가득 차고 있었다. 배가 침몰할 위기에 놓였다. 더구나 밤중에 폭풍이 일어났다는 말은 상황이 꽤 위험하고 심각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방석을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이는 위험한 상황을 평정하시는 예수님의 권능을 강조한다. 제자들은 일어나 그분을 깨우면서 자기들이 지금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냐고 원망했다. 하느님의 권능이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제자들이 믿고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같은 배를 타고 계시는데도 하느님 왕권의 실현을 가로막는 힘(폭풍) 앞에 굴복할 위험에 놓여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원망을 듣고서는 폭풍을 멎게 하고 바다를 잠잠하게 하셨다. 유다인들은 바다가 혼돈과 악의 세력을 상징하며, 폭풍은 이러한 악한 세력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여겼다. 예수님은 믿음이 결여된 제자들을 위해 하느님의 왕권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악한 혼돈의 세력을 파괴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창세 8,1; 시편 74,13-14)으로 사람들을 이 세력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이다. 예수께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기적은 하느님이 예수님을 통해 천재지변을 없애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구원계획을 가로막고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악한 세력을 이기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겪는 폭풍과 같은 시련은 대부분 삶을 자기 뜻대로 요리할 수 없고 인간관계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관계는 순조롭기만 하지 않고 험난하기도 하다. 남이 나를 불행하게 하기도 하고 나 자신이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가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는 사람도 있고 왜 이런 가족을 가졌는지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늘 기쁘게 사는가 하면 또 누구는 늘 미간을 찌푸리고 산다. 나의 대인관계가 어떠한지 살펴보면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알 수 있다. 이웃과 잘 사는 사람이 하느님과도 잘 살고, 하느님과 잘 사는 사람은 이웃과도 잘 산다.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은 이웃에게도 불평분자이다. 하느님께 늘 고마워하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늘 고마워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그 근거를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고마워하고 기뻐하는 습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고마워하고, 기뻐하고, 행복해지는 것은 학습이고 습관에서 비롯된다.
습관은 오래 계속된 실천이며, 결국에는 그 사람 자신이 된다. 하기 싫은 일도 계속 되풀이 하면 습관이 되어 나중에는 싫은 일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실만큼 감미로운 것으로 변한다. 좋은 습관을 버리기는 쉽지만 다시 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좋은 습관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을 중단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6월 28일 연중 제13주일 : 마르 5,21-43
21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22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24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25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27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30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33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35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39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43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분부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으로 오셨을 때, 야이로라고 하는 어떤 회당장이 올라와서 그분 발밑에 엎드렸다. 당대 유다 사회에서 존경받는 종교인인 그가 종처럼 비천하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께 도움을 간청한 것은 파격적이다. 그에게는 열두 살 먹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었다. 사랑하는 딸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안 아버지의 마음은 다급하고 비통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의 집으로 가시는 길에 12년 동안 하혈하는 부인이 군중 가운데 있었다. 그의 병은 당대 의술로는 불치병이었다. 날이 갈수록 병세는 악화일로였고 재산마저 다 탕진했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하혈 병은 율법규정에 따라 신체적 접촉을 통해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부정하게 만드는 고약한 병으로 간주되었다.(레위 12,1-8; 15,19-30) 이 병을 앓는 부인은 과월절과 같은 대축제에 참여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소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처럼 그는 당대 사회에서 소외되고 종교적으로 멸시받는 약자였다. 그는 자기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자기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예수님의 몸에서 치유의 힘이 나와 병이 치유되었다. 그는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을 온갖 불행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모든 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 구원받으라고 그에게 강복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죽은 딸의 손을 잡고 모국어인 아람말로 ‘탈리타 쿰’(“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말씀하며 그를 살려 주셨다. 아버지의 믿음 덕분에 딸이 생명을 되찾는 특혜를 받았다. 소녀는 즉시 일어나 걸어 다녔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시체에 손을 대지 말라는 율법의 금령을 능가하시는 주님이요, 죽은 이들을 살리시는 하느님이며,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시는 메시아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다시 살려주심으로써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고 예고하셨다. 나아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죄와 죽음을 파괴하고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셨다. 또 예수님은 사람들을 질병이나 죽음에서 구원함으로써 하느님의 왕국이 행복과 기쁨으로 가득 찬 곳임을 미리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의 뜻은 육체의 병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다른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해 주신 데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참된 기적은 병치유나 자연의 이변현상이 아니라 이기심을 버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악습을 고치는 것,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기적을 추구하지 말고 스스로 노력하여 기적을 이루고 노력한 뒤 하느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뜨면, 하느님이 평범한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기적을 일으키며 우리에게 대화를 걸어오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일상사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을 체험해보아야 한다. 믿음은 체험에 뿌리내린 것이고 순간적인 사건이 아니라 평생토록 이어지는 여정과 같은 것이다. 믿음의 눈을 뜨면 죽은 뒤의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다. 믿음의 눈을 뜨기 위해 날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그분을 떠났기 때문에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아도 그 뜻을 깨달을 수 없다.
* 박영식(야고보) 신부는 1976년 사제서품 후, 1978년 로마 유학, 1982년 로마 교황청직속 성서대학(Pontifical Biblical Institute)에서 석사학위(S.S.L.)를 취득, 1990년 같은 대학에서 성서학 박사학위(S.S.D.)를 받으셨습니다. 현재 복현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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