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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7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박병규(요한보스코) 신부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순교자 대축일 : 마태 10,17-22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전 신학생 시절, 라틴어를 배우면서 몇 개의 라틴어 격언을 주워들은 적이 있다. 그 중  아직까지 나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문장이 하나 있는데,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것이다. 섬뜩한 표현이다.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도 모자라는 이 인생살이가 온통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라니….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격언이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고 있자니 어쩜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에 스스로 화들짝 놀라게 되었다. 애써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그 격언을 수없는 시간의 흐름과 그 속에 펼쳐진 수많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 자신이 바로 ‘다른 이웃과 사회에 늑대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많이 부끄럽기도 했다.


오늘 복음에 형제가 형제를 넘기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날 것이라 했다. 그런 ‘갈라짐’의 모습을 우리는 싫어한다. 그 갈라짐의 자리보다는 오히려 22절에 나오는 참고 견디는 이, 그래서 구원받는 이의 모습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으려한다. 우리 주위의 갈등과, 분열, 그리고 싸움 전쟁 따위의 ‘속시끄러운’ 세상사는 우리의 자리가 될 수 없음을 굳이 되뇌곤 한다. 소위 ‘신앙인’은 ‘갈라짐’의 세상 안에 화합과 평화를 실천해야 하는 사람임을 애써 강조하면서 말이다.


오늘 복음 말씀의 묵상 글을 준비하면서, 나는 화합과 평화의 자리가 아닌 갈라짐의 자리에서 버젓이 살아감을 부끄러이 깨달았다. 나 자신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있으면서 남을 비판하고 애써 남을 무시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곤 온통 나만을, 나의 합리화를 위한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기도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사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의 말이, 우리의 생각이 그분의 영이 일러주시는 대로(20절) 드러나도록 살아야 한다. 내 안에 타 존재, 곧 하느님을 받아들일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게다. 너무 많이 들었던 말이고, 앞으로도 우리의 신앙생활 내내 들어야 할 말이다.


늘 타인을 받아들인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늘 타인을 미워하고 살아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 모순된 두 자세를 우리는 견뎌내어야 한다. 미워하며 갈라지는 그 순간에, 사랑을 외치며 어떻게든 화합과 평화를 살아내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나에게 주어지는 외적인 종교적 규범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모순 덩어리를 매일의 삶 안에서 짊어져야 하는 것이 신앙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 화합, 평화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미움, 분노, 원망을 쏟아내고 있고, 그것으로 부끄럽고, 죄스럽고,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 늘 이렇다면, 그 삶이 끝자락을 만나는 날 하느님께서 ‘구원’이라는 그 큰 선물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신다면, 이 어려운 신앙이라는 것, 한 번쯤 이 꽉 깨물고 꿋꿋이 살아갈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7월 12일 연중 제15주일 : 마르 6,7-13

7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제자들이 파견을 받는 장면이다. 파견된 이의 자세가 어떠한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파견된 것임에 틀림없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이 없으며, 죽고 싶어서 죽는 이 없을 게다. 세상 안에 있다는 것 그것은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어야 한다.


지팡이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허용치 않는 예수님의 엄격함을 똑바로 쳐다보자. 엄격함 너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간절함도 생각해보자. 내가 가진 것 하나 없어, 어떻게든 너를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처지가 파견된 이의 처지이다.
받아들여져야만 살 수 있고, 그렇지 못할 때는 발의 먼지조차 털어버릴 정도로(11절) 철저한 관계의 단절만을 맛볼 것이다. 주어진 것이 없으니 빵도 먹지 못하고 돈도 쓰지 못할 것이며, 추워도 입을 옷이 없을 것이다. 불쌍하기 짝이 없다. 너 없이는 나는 거지꼴 못 면할 것이다. 파견된 이는 이렇게 간절히 ‘너’를 찾을 수밖에 없다. 


회개의 선포로 오늘 복음은 끝을 맺는다. 회개가 무엇인가. 혼자 독불장군처럼 살지 말고, 이웃에게, 타인에게, 그리하여 하느님 그분에게 온전히 돌아서 있음을 일컫는 말이다. 나 말고, 너를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이 회개의 본질이다. 세상 모든 것이 주어졌음을 고백한다면 모든 것이 누군가로부터 거저 받은 것이다.


감사하며 살자. 거저 받은 것을 나 혼자 누리려 하지 말자. 특히나 그리스도에 의해 파견된 이들, 잠시만 옆을 쳐다보자. 누가 보이는가? 내 눈에 보이는 그들이 바로 나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풀고 있는 그들일 게다.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 : 마르 6,30-34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사도들이 한 일과 가르침은 예수님께 보고되었다. 예수님의 반응이 나를 놀라게 한다. 외딴 곳으로 가서 쉴 수 있기를 권하신다. 사도들의 일, 그리고 그 가르침에 대한 평가는 어디에도 볼 수 없다. 많은 경우, 우리 교회의 일꾼들은 자신들의 일을 수행한 후에 냉철한 평가를 강요받는다.
이 평가를 곰곰이 살펴보자면, 대부분의 경우가 일꾼들 사이에서 일어난 잘잘못을 따지곤 한다. 다음에는 너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여라, 다음에는 저 사람 말고 이 사람을 쓰도록 하자, 그리고 다음에는 이런 일 말고, 저런 일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등등. 이러한 일에 대한 평가는 하나의 일을 통해 다음에 있을 일을 미리 생각하고 재단하게 된다. 필요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 평가에 의해서 우리 교회의 미래가 더욱 풍요롭게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보자. 외딴 곳으로 가서 쉬라고 하셨다. 외딴 곳, 그리스 말로 사막을 뜻하기도 하는 이곳은 사람들과의 떨어짐이 강조된 장소다. 32절에 ‘카타 이디안(kata idian)’ 이라는 그리스 말이 있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각자가, 혹은 스스로 등의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장소의 의미를 더욱 부각 시키는 말마디이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일과 가르침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예수께로부터 들은 첫마디가, 사람들로부터의 떨어짐이다. 일로부터의 해방을 일컫는 말이다. 일하는 자에 대한 배려가 담긴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있어서 일에 대한 평가는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애정, 그것이 전부임에는 틀림없다. 

      
제자들이 떠나가 쉬고자 한 장소는 쉼의 장소가 아니었다. 또 다른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흔히들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한다. ‘하느님 사업에 쉼이 어디 있느냐?’고 웃으면서 넘겨듣던 말이 새삼 강하게 와 닿는다. 하느님 사업에 쉼이 없는 것은 해야 할 일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 사업에 쉼이 없음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제자들을 보고 싶어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멋진 일을 만들어내고, 훌륭한 행사를 치러내며,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하느님 사업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사람에 대한 연민이 하느님 사업의 시작이요 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우리 교회는 많은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많이들 해나갈 것이다. 그 일의 잘됨과 못됨은 우리 교회 일꾼들의 마음을 보고 판단했으면 한다. 행여 상처받은 일꾼이 없는지, 행여 토라진 일꾼은 없는지, 그들을 보듬고 다독거리는 것이 우리 교회의 일에 대한 중요한 평가가 될 수는 없을까?

 

 

 

7월 26일 연중 제17주일 : 요한 6,5-15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장정만도 오천이 넘는 군중을 먹인 이야기, 기적 이야기이다. 아니,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빵과 물고기가 그 많은 군중을 위해 엄청난 양으로 둔갑했음을 은연 중에 생각할 것이고, 그 생각이 사실일 거라 확신하게 되고, 이어서 우리 신앙인들 사이에 ‘기적이다.’하며 예수님의 초인적 능력에만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다르게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오늘 복음 말씀 안, 그 어디에서도 ‘기적이다.’라는 표현은 없다. 특히 13절에 분명 군중들이 먹은 것은 ‘불어난’ 아니 ‘불어났다고 생각한’ 보리빵이 아니라 단지 ‘다섯 개’의 그 보리빵을 먹었다고 되어있으니(그리스 말에 분명 보리빵 다섯 개를 정확히 지칭하는 정관사가 있다.) 기적이다. 호사스럽게 난리피우지 말고, 차분히 오늘 복음을 읽고 묵상해보자.


먼저 필립보의 태도, 그리고 안드레아의 태도에는 한 가지 동일한 면이 있다. 필립보는 군중의 수와 빵의 수를 비교분석하여 2백데나리온 이라는 빵의 가격을 내놓는다. 안드레아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군중의 수를 비교해보면서 가지고 있는 빵과 물고기의 가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둘다 군중들의 식사는 도대체가 불가능한 것임을 확신한다. 그들에게 있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가치는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태도는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예수님에게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여기 이 자리에 버젓이 있다. 없지 않고, 무조건 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자 .먼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나눔을 행하신다. 있는 것,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에 대한 감사이고, 그것에 대한 나눔이다. 그리고 이 감사와 나눔은 군중들의 ‘원함’과 연결되어 있다.
도대체 몇 개의 빵을 원했고, 몇 마리의 물고기를 원했는지 알 수가 없다. 수많은 군중이 원한 것이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턱없이 부족할 수도 있지만, 오늘 복음 말씀처럼 차고 넘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왜 생각지 않는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렇게 없어 보여도, 그 군중들 각자가 예수님처럼 감사하며 나누고자 할 때, 그들의 원함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함을 왜 깨닫지 못하는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보잘 것 없고, 부끄럽게 보이는가? 그렇다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자꾸만 더 가지려고, 더 챙기려고 하다가는 영원히 배고프게 될 것이다. 요즘 세상은 희망, 꿈, 비전 등등의 단어들이 차고 넘친다. 모두가 하나같이 지금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잊어가고 있다. 기도할 때도, 희망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갈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을 읽을 때도,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삶의 처지를 조금만 더 낫게 하려고 작정을 한다. 하지만 한 번만 반문해보자.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삶이 그렇게도 꼴불견인가? 그렇게도 가치 없고 허무한 것인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것으로 우리 인생 전체를 살 수 있고, 그것으로 우리 인생 전체를 멋지게 꾸밀 수도 있다. 단, 그것에 감사하며 이웃과 나누고 살아갈 때에 말이다.

 


* 박병규(요한 보스코) 신부는 5대리구 청년담당 사목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