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몸(Corpus Christi)’이라는 교회 행사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치뤄지는 행사인데 국가적인 기념일로 도심지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주 경기장에 약 3만 5천명 이상의 신자들이 모여들어 함께 미사를 드리는 어마어마한 행사입니다. 예식이 시작되면 복사단, 신학생, 사제, 주교, 추기경님의 순으로 주경기장 트랙을 한 바퀴 돌고 난 뒤에 한 가운데에 마련된 제대 주변의 자리로 가 앉게 됩니다.
처음 경기장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마주치게 되는 그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을 보노라면 절로 입이 벌어지게 됩니다. 행렬이 진행되는 동안 기립한 사람들의 끊임없는 환호와 박수소리에 마치 나 자신이 무엇이라도 되는 양 들뜬 기분에 휩싸여 버립니다. 약 2시간 가량의 미사가 끝나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다시 줄을 지어 시내 한가운데 있는 주교좌성당까지 성체를 모시고 행진을 합니다. 이 때 경찰들이 나와 차량 통행을 막고 봉사자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일렬로 양쪽에 늘어서서 행렬하는 사제단을 보호하는 광경은 또 하나의 볼거리입니다.
그런데 주교관으로 향하는 행렬을 하는 동안, 사람들이 나를 향해 사진기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동양인이고 젊고 하니(게다가 ‘천국의 계단’ 주인공도 닮았고 하니…) 사람들의 시선을 끄나보다 생각하면서 못내 흐뭇한 마음으로 행진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그런 환상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내가 뒤를 돌아다본 순간 금세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내 얼굴 사진을 찍어댄 것이 아니라 내 바로 뒤를 쫓고 있던 예수님, 즉 성광에 모셔진 성체의 사진을 찍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연히 흐뭇해했던 내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신학생 때부터 사제 생활에 이르기까지 이런 착각에 빠지게 되는 일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신학생과 사제들을 사랑해주는 이유는 결코 그들이 가진 탈란트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수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바로 그 분을 가슴 속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두고 칭찬을 해 줄 때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칭찬을 좋아하는 우리의 본성상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칭찬의 내용인 내 안에 들어있는 ‘짠 맛’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저 껍데기 모양새를 두고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는 모두 스스로의 내면 안에 무엇이 들어있나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 아무리 겉으로 화려화게 장식된 가마라도 그 안에 시체가 들어가면 상여가 되어 버리는 것처럼, 제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고 인물이 좋고 재주가 많다 하더라도 그 안에 ‘거룩한 것’, ‘짠 맛’이 없고 ‘음란, 방탕, 거짓’들이 가득하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버려져 뭇사람들에게 밟히는 존재가 됩니다.
 
이 곳 볼리비아에서 지내면서 가끔 이 곳 전통 춤을 배워 공연을 하고,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랩송을 배워 부를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나에게 찬사를 던지지만 저는 그런 그들의 시선이 불과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외적인 수단들은 다만 일순간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예수님께로 이끌려고 한다면 저는 이 곳 볼리비아에서 잔재주만 가진 천덕꾸러기,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소금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머물고 있는 공동체, 직장, 가정에서 진짜배기 ‘짠 맛’을 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성사’와 ‘기도’ 외에는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 번 한 달, 더위를 피해 바닷가에서 짠 맛을 찾기보다는 ‘미사와 고해성사’, 그리고 ‘기도’ 안에서 진정한 ‘짠 맛’을 찾으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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