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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신나무골 성지
영남지역 선교 요람지, 신나무골


이은영(데레사) 본지기자

신나무골 성지 입구에 이르러 돌 계단을 오르자 잘 정돈된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 묘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주위로 묘지를 감싸듯 십자가의 길이 이어져 있다. 머리 위로 바로 떨어지는 7월의 뙤약볕과 시끄러울 정도로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마음이 흔들리던 것도 잠시, 이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중하리에 자리한 신나무골 성지. 이 신나무골은 우리 신앙 선조들이 함께 모여 살던 교우촌으로 그 역사는 190년에 이른다. 지금 살고 있는 여섯가구 여덟 명의 주민 모두 몇 대째 내려오는 구교 집안 신자들이다. 성지 뒤에 자리한 사회복지시설인 엘리사벳 집 식구들까지 합하면 70여 명의 신자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고 하겠다. 현재 영남지방에는 신나무골을 비롯해 청도의 구룡공소, 칠곡의 남원공소, 김천의 서무터공소 일대가 완전한 신자촌 형태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신나무골에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때는 1815년 을해박해 때로 추정된다. 맨처음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대구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의 옥바라지를 하던 그의 부인과 아들이다.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등에서 살고 있던 신자 200여 명이 체포되어 일부는 배교하고 일부는 옥사한 가운데 33명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 때 이들의 가족과 다른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몇 가정이 대구와 가까우면서도 외딴 곳인 이곳 신나무골로 이주해 살게 되었다. 그후 외지에서 온 신자들과 이 지방 신자들이 합하여 큰 신자촌을 이루게 된다.

 

마백락(클레멘스) 영남교회사연구소 부소장은 “우리 신앙 선조들이 아무곳에나 가서 신자촌을 이루며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전란이 있을 때 피난민들이 피난 왔다 죽지 않고 살았던 곳을 알아보고 이주해 와서 살았습니다. 신나무골이나 한티 모두 임진왜란 당시 피난지였답니다.”라고 전한다.

 

신나무골 성지는 1977년부터 지난해까지 세 차례에 걸쳐 성역화 사업을 해왔다. 그 결과 ‘대구 천주교 요람지’기념비를 세우고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 묘를 이장해 왔다. 또 대구본당의 첫 본당터를 복원하기 위해 김보록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그리고 전시관을 복원하고 김보록 신부의 흉상도 건립하였다. 그러나 피정객들이 사용하던 명상의 집은 지은 지 너무 오래 되어 현재 출입이 불가능하고, 신나무골 학당은 지난 해 불어닥친 태풍 ‘매미’로 무너진채 방치되고 있어 이곳을 찾는 순례객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1883년에 세워진 신나무골 학당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도 함께 가르친 학교로, 서울 계성학교의 전신인 한한학교와 함께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최초의 신식학교이다. 그 유명한 이화학당과 배제학당도 3년 뒤에나 세워졌다고 한다.

 

대구와는 거리상으로 가까웠기에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기도 했던 신나무골은 최양업, 다블뤼, 리델 신부들이 사목활동을 했던 곳이다. 이후 경상도와 전라도의 사목책임을 맡은 김보록(Robert, 로베르) 신부가 1885년 12월부터 1887년 11월까지 3년간 거처하면서 성무를 집행했던 곳이기에 신나무골은 대구본당 첫 본당터이기도 하다. 또한 전주본당을 설립한 윤사물 (보두네, Baudounet) 신부도 1887년에서 1889년 3월까지 이곳에 있다가 임지로 부임하였으며, 1889년부터는 죠조(Jozeae) 신부가 이곳에서 사목하다가 1890년 첫 부산본당 신부로 발령받았다. 1894년에는 하경조(Paihasse, 파이야스) 신부가 이곳에 있다가 낙산본당을 설립하여 임지로 떠나는 등 신나무골에 부임한 사제들이 전주, 부산 등지로 본당을 설립해 나감에 따라 신나무골은 대구본당과 전주본당, 부산본당의 전신이자 시발점이 되었다.

 

한티의 첫 순교자인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은 1860년 경신박해 때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목숨을 잃은 순교자이다. 마침 그 후손들이 생존해 있어서 1984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칠곡에 있던 무덤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마백락 부소장은 “신나무골 성지는 경상도 지방 신앙의 요람지이자 특히 선교사들의 남쪽 지방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였다는 것. 그리고 200년이 다 되어 가는 신자촌이면서 신나무골 학당이 서울의 한한학당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일반학교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성지를 둘러보면 좋겠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한티까지는 산길로 90리(33.3km) 거리이다. 한티에 미사가 있을 때는 신나무골 교우들이 이 길을 통해 한티에 갔고, 또 신나무골에 미사가 있을 때는 한티 교우들이 이 길을 통해 신나무골로 왔다고 한다. 그리고 박해 때마다 신나무골 교우들은 이 길을 통해 한티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신앙선조들이 걸어다녔던 이 길만큼 좋은 도보성지순례길이 있을까?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우리 지역 신앙의 요람지인 신나무골 성지를 순례하고 신앙선조들이 걸었던 산길을 통해 한티에 오르는 것도 좋은 신앙체험이 되리라. 산길로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는 10~12시간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