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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책 한 권
《어린 왕자》를 만나다


정재숙(소피아)|시인, 만촌 3동성당

내가 언제부터 《어린 왕자》를 만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린이 시절이 아니고 어른이 되어서야 만난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동화인 이 책은 내게 있어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이 되었다. 마음이 허전하거나 삶의 심한 허기증으로 어지러울 때, 누군가 속삭여 주기를 바랄 때, 끝없는 불면의 밤이 지속될 때,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을 때, 어린애처럼 칭얼댈 곳이 목마르게 필요할 때, 내가 누군지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가슴이 콱 막혀 올 때, 어김없이 내가 찾는 책, 그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다.

나는 사막을 좋아한다. 가장 척박한 생존의 조건 그 자체인 사막의 황량함이 처연하게 가슴에 와 닿는 건 왜인지 나도 그 이유를 모르는 일이지만…. 삭막한 현실에서도 생명과 사랑의 빛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우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곳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탓일지!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우물을 숨겨놓고 있어서 그렇다.”는 어린 왕자의 말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그는 또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했다. 나는 그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내가 숨겨놓을 건 무엇일까? 나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내가 숨겨놓을 건 무엇일까? 아직 나는 내가 숨겨놓은 것 없이 저절로 숨겨진 그 우물을 찾고자 하는 마음만 가지고 성급하게 모래를 맨손으로 파헤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나에게 어린 왕자는 단 한 송이 장미나 한 모금의 물로도 바라는 것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주기도 했다. 단 마음의 눈으로 찾아야 한다면서, 나는 그때 그것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의 존재가 무엇인지 희미한 그림자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왕자는 사막의 우물에서 달디 단 물을 마시고 자기가 길들인 하나밖에 없는 한 송이 장미꽃을 책임지러 자기의 별로 돌아가고, 나는 숱한 고통과 좌절을 겪으며 가장 소중하게 숨겨진 구원의 손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근원적인 삶의 본질은 오직 한 분 그분께로부터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으니 《어린 왕자》는 영원으로 통하는 길을 내게 알려준 길잡이였다고 믿고 싶다.

어린 왕자는 언제나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은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이 드는 요즘은 죽음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죽음의 긴 터널을 지날 때보다 오히려 흔들리고 두려워하며 겁을 내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자신의 나약함이 부족한 신심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기도 한다.

총 고해성사를 하고 병자성사를 받았을 때 나는 정말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더 이상 깨끗할 수 없이 깨끗해진 영혼은 깃털보다 더 가볍게 하느님 품에 날아가 안길 수 있었고 더 이상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나 병과의 질기고도 처절한 싸움을 하며 오늘까지 살아있고,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걸 은총이요 축복이라고 받아 안는 것만큼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어쩔 수 없이 나를 짓누르고 잠 못 이루게 하고, 자다가도 쿵! 가슴 떨어지는 소리를 나게 만들고 있다.

누군가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고 죽음에 대한 생각이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지 않은가? 죽음 너머의 세계는 나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철저히 그것은 신의 영역이 아닌가! 살아있는 날은 잘 사는 일만 하고, 죽음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를 찾아 올 터인데 결과적으로는 잘 사는 게 잘 죽는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말은 무섭고도 두렵다.  어린 왕자도 그랬다. 지구를 떠나는 마지막 날 밤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실 난 오늘 밤이 더 무서워.”, “나는 내 별까지 무거운 몸을 가져 갈 수 없어. 몸은 버려야 할 낡은 껍질일 뿐이야. 그까짓 껍질을 버린다고 슬퍼해선 안 돼.”, 나는 어린 왕자의 이 말에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래 맞아, 낡은 껍질일 뿐이야. 나의 장미꽃이 나를 반겨 줄 나의 별로 되돌아가는 것뿐이야. 다만 우리가 어린 왕자와 다른 것은 장미꽃을 두고 온 나의 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뿐이야. 대신 살아 있는 날까지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쳐다보며 나의 별을 찾는 거야. 나를 기다리며 예쁜 꽃을 키우고 있을 나의별을 쳐다보며 아주 행복한 마음으로 그 분이 내 손을 잡아 그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을 믿고 기다리는 거야. 어린 왕자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이렇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 주고 떠난 너의 별에서 들려오는 5억 개의 작은 방울 소리를 너의 웃음소리로 들으며 무서움과 두려움 뒤에 숨은 너의 선물을 놓치지 않을게.”

내 삶에서 《어린 왕자》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다. 가슴 아득할 때면 어김없이 하늘을 쳐다보며 어린 왕자가 들려준 말을 기억하고, 죽음 저 너머의 세계를 구원의 별로 반짝이게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 정재숙(소피아) 님은 대구가톨릭문인회 회장직을 맡아 봉사하면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아름다운 삶을 꿈꾸며 시를 쓰고 시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시인입니다. 《네 시린 발목 덮어》로 등단하였으며,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협회 대구지역회원, 서설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