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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8월의 주일복음, 그 여정을 따라서


심탁(클레멘스) 신부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 요한 6,24-35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1. 교회는 군중에게 ‘생존 도우미’와 ‘하느님 나라 표징’의 빵을 주라.
군중은 빵을 원한다.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하느님 나라로 이끄신다. 대개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동기는 매우 현실적이다.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책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자 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부족한 출발이지만, 군중이 예수님 안에서 그 인생의 답을 추구한 점은 유효하였다. 교회 안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투신하고 봉헌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계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또 심지어 교회의 자원봉사자 가운데에서도 생계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도 있다. 교회가 대사회적 봉사활동을 하되, 순수하게 신앙적인 차원에서만 사회 복음화에 접근하는 것은 복음의 전인격적 구원의 차원에서 적합하지 못한 면이 있다. 어느 시민의 빵 - 생계 문제를 무시한 채 하느님 나라만 선포하는 것은 균형이 없는 것이다.
만약 어느 기업이 눈앞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직원복지에 소홀하거나 미래 지향적인 연구 및 시설투자 등을 하지 않는다면, 그 기업은 크게 성공하기 어렵다. 이처럼, 교회는 세상이 표출하는 시대의 징표를 읽고 세상과 교회의 미래 비전을 열어나가야 할 뿐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세상의 재화를 잘 사용하고 베풀며, 하느님 나라를 위한 재투자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사회와 교회의 육적인 문제와 영적인 과제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잘 유지하려고 애쓰되,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본질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 근본 핵심이라 하겠다. 세상의 육적인 관심을 넓은 의미에서 교회의 관심으로 받아들여서 세상의 고민을 품으면서 뛰어넘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군중의 동기에는 문제가 있더라도, 그들의 그리스도 선택이 옳은 것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영원한 생명의 빵을 제공하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모인 사람들과 생계의 빵을 나누어 먹어야 한다.


2. 군중이 ‘빵’에서 ‘표징’을 읽게 하라.
빵은 일회적으로 먹어 없어지는 것으로 썩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빵의 표면적 가치와 의미 이상의 것을 바라보게 되면, 그 빵의 가치는 달라진다. 그것은 빵의 주체이신 ‘예수님의 전인격’을 담고 있고,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다. 성경 본문에 빵과 표징이 복수로 쓰였다. 빵과 표징의 풍부한 의미들을 품고 있다는 의미다. 사목헌장 4항에서도 교회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때도 ‘징표’는 복수로 쓰인다. 다원화된 이 세상과 다양한 교회의 구성원들이 지닌 시대의 여러 가지 ‘징표들’을 읽어야 한다.
시대의 징표들을 읽는 것은 교회의 마땅한 의무이며,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항상 선행적으로 행해야 할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답을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군중)과 그 세상의 기대와 열망(빵)과 때로는 극적이기도 한 그 특성(현세적인 의미의 극단적 다양성과 충돌)을 인식하고 이해하여야 한다.


3. 군중이 빵의 표징을 읽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게 하라.
군중이 빵을 먹음과 배불림에 그치지 않고, 빵의 표징을 읽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거기에는 그 중심에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말씀, 현실에서부터 시작하는 미래 지향적 하느님 나라의 비전이 있다. ‘빵’은 세상의 먹거리를 뜻하지만, 이런 세상의 일에서도 ‘표징’을 구하면, 거기서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획득한다. 구름 낀 흐린 하늘(세상의 일, 표면적 현상)에서 일차적인 ‘표징’을 읽으면 비가 올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천지창조와 조화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의 업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신앙인은 세상의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 하느님 나라를 보고 듣는다. 모든 일과 사건에서 하느님의 창조적 질서와 조화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 모두를 받아들이며 의미를 해석한다. 이는 억지스런 신비주의가 아니라,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살아있는 현재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깨어있음으로 이루는 일이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일에서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구할 것이며, 썩어 없어지지 않을 빵을 구하라. 그 궁극적인 대답을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찾아라. *빵 - 썩어 없어질 양식 / 표징 -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는 도구(상징, 표징, 성사적인 것) /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 - 빵의 표징적 의미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다.


4. 하느님의 일을 하라.
신앙인은 시대의 징표를 읽고 의미를 해석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앙인은 최고의 의미를 추구하며 행동하는 자이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서 최고의 행동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과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의 기초 위에 하는 모든 행위는 최고의 의미를 이루는 비결이다.


5. 이때 항상 믿음의 표징(그리스도와 교회의 성사성)을 이용하여, 선포하고 증거하라.
제자들이 알고 있는 ‘표징’은 말씀(들음과 실천의 원동력)과 양식(먹음과 실천의 원동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6,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6,3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6,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8월 9일 연중 제19주일 : 요한 6,41-51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1. 예수님께로 오라.
‘예수님께 오는 사람’이 구원받는다. 새 번역 성경의 본문에 ‘예수님께 오다’는 표현이 세 차례 나온다.(44절에 2회, 45절에 1회)
1) 아버지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고, 그 말씀을 듣고 배우라.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첫째로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사람’이다.(44절)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둘째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이다.(45절)


2)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라.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44절) 포도나무의 비유에서처럼, 예수님께 끝까지 매달려 있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그가 죽었더라도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살리신다. 그는 이미 하느님께 이끌림을 받으면서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46절) 그리스도 이전의 세대에서 모세는 이미 아버지의 이끄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아버지를 보았다. 이제 그리스도 시대에는 예수님을 통하여 직접 하느님을 뵙는다.
 

3)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나아오고 예수님을 본 사람이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길이 소개되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4)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 “나는 생명의 빵이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41절. 48절. 50절. 51절) 가장 절정에 해당되는 또 다른 구원의 길은 예수님의 생명을 직접 섭취하는 것이다. 성사적 도구를 통하여 예수님이 지니신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먹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신비롭고 가장 완벽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생명을 내 몸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현세에서 이미 확실하게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2.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세상에 오시니(수직하강), 너희는 예수님께 오라.(수평이동)
1) 예수님은 하늘에서 세상으로 ‘내려’오신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낮은 곳까지 내려오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4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42절 참조 :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50절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필리 2,6-8에서 예수님의 하강 도식이 사용된다. 하느님의 생명(본질과 신성)을 지니신 분이 사람과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최악의 십자가 죽음까지, 아버지께 드리는 순종으로 행동하신다. 이것이 구세주의 참 모습이며,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움직이고 완성하게 한 교회 생활의 원리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교회와 세상의 수평이동은 엄밀히 따지면, 또 다른 하강운동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와 죽음의 세계에까지 내려오신 까닭이다. 가장 작고 가장 낮은 자에게 내려가시어 일치하시기 때문이다.

 

2) 너희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 오라.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6절) 구약의 율법, 모세의 가르침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측면에서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이 말씀으로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 삼라만상을 운용하신다. 죽은 뼈들도 당신의 말씀과 영으로 새 생명을 주신다.(에제 37장 참조) 하느님 말씀의 능력과 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배우고 성장하며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다.
 

3) 너희는 빵을 통하여 예수님의 살을 먹어라,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 48절 “나는 생명의 빵이다.” 50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 주신다.(44절) /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47절) 예수님(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그는 영원히 산다.(51절)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님은 능동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며, 세상 사람들 누구라도 와서 먹으라고 내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빵으로 주어진 살이다. 여기까지는 예수님께서 능동적 입장을 취하신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이유와 방법을 통해서든지) 스스로가 예수님께 와서 먹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세상에 생명의 빵으로 오셔서 사람들이 다가와서 먹어주기를 기다리신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말씀과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께 다가와서 먹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는 바로 여기서 중개자 역할을 한다. 교회는 세상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예수님께 다가 올 수 있도록 장을 만들고, 말씀과 믿음으로 그들 스스로 생명의 빵을 원하고 먹도록 도와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교회 스스로가 예수님의 살을 먹어 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상에서 생명의 빵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8월 16일 연중 제20주일 : 요한 6,51-58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2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1. 지혜의 삶을 추구하라.
제1독서 잠언 9,1-6은 인격화된 지혜로 살도록 초대한다. 제2독서 에페 5,15-20은 지혜로 사는 법을 비교적 자세히 알려준다. 즉 15절-지혜의 삶에로의 초대하면서, 16절-시간 잘 쓰기(시대의 징표 읽기), 17절-주님의 뜻 깨닫기, 18절-성령 충만 하기(술, 방탕 피하기), 19절-공동체의 전례적 일치와 주님 찬양, 20절-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기 등의 가르침을 준다. 요한복음은 인류가 상상할 수 없었던 최고의 지혜를 가르쳐 준다. 즉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빵>을 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라>는 것이다.

 

 

2. 최고의 지혜를 선택하라.
예수님의 존재 이유는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 존재의 기능적 가치와 목적(혹은 정체성과 사명)을 세 차례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밝혀준다.
1) 첫째 부분 : <존재 기능>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존재 목적> 51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53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2) 둘째 부분 : <존재 기능>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존재 목적>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3) 셋째 부분 : <존재 기능>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존재 목적>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위의 세 가지 구별은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 예수님의 살을 빵으로 먹는 것, 그분의 피를 포도주로 마시는 것, 그분 안에 머무는 것 이 모두가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다. 죽어 없어질 존재자가 지혜를 발휘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이상의 지혜가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3. 최고의 지혜는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 : 먼저 누리고, 나와서 나누어라.
다만 예수님을 먹는 방법이 무엇인가? 첫째,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생명의 기능을 허락하신 말씀을 먹는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살이 빵의 형상으로 세상에 전해지는 성찬의 빵을 먹는 것이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었다.(에제 3,1이하)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로 이미 숨 쉬고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공기의 고마움을 잘 모르고, ‘본래 그렇다.’거나 ‘저절로 그렇게 된다.’면서 당연시 하듯이, 하느님 말씀과 성체의 위력을 현실적으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 부모의 위대한 은혜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듯이 하느님 말씀과 성체의 은혜로움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고 배우고 믿고 전파하며 사는 것은 그가 누구든지 자신의 참된 지혜를 먼저 누리고, 증거하며 나누는 것이 된다.

 

 

 

8월 23일 연중 제21주일 : 요한 6,60-69

60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6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62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6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분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들어라.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요한 6,60)
1) 예수님의 제자는 일단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자이다.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계시진리이며, 그 말씀 자체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 이전에 보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들음이다. ‘들음’ 없이 ‘믿음’이 없다. 누군가는 선포해야 하고, 다른 누구는 선포되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신앙의 첫 단추가 끼워진다.

 

 

2)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제자들의 태도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예수님의 생명의 빵 말씀을 듣고 거부감을 느끼며 완전히 떠나 간 제자들, 둘째, 적극적인 태도로 신앙고백적인 대답을 한 베드로, 셋째, 묵묵부답의 열 한 제자들, 그들 가운데는 배반자 한 명까지 포함되어 있다.
첫째 그룹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의 깊은 의미를 새길 여유도 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에 입각해서 즉각적인 평가를 내리고 반응을 보인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상식을 내세운다. 자신의 지식이 절대적 기준이 되는 사람의 경우에 해당된다. 셋째 그룹에는 침묵의 열한 제자가 포함된다. 침묵에는 보통 중립적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직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긍정 반응도 부정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깨우침이나 그분의 신분과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가운데 미래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배반의 가능성도 있다. 세상 감각으로 보면, 예수님 말씀은 결과적으로 볼 때, 110% 성공하고 유다의 배신과 자살로 인하여 10% 실패한 셈이다. 둘째 그룹에는 유일하게 수제자 베드로가 속해 있다. 그는 정확한 말로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한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2. 예수님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긍정적으로 응답하라, 베드로처럼….
1) 제자는 항상 스승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할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 오늘의 복음은 ‘생명의 빵 말씀’의 마지막 대목이다. 여기서 다수의 제자들은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열한 명은 반응이 없고, 베드로 한 사람만 적극적인 반응으로 긍정적 대답을 한다. 주님의 말씀에 거부감을 느끼고 떠나간 제자들은 육적 차원의 감각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설명에서 그 속내용이 드러난다. 믿음이 없는 단계이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요한 6,63-64) 중립적인 열한 명의 제자들은 말이 없다. 중립적 입장은 아직 믿음의 단계로 보기 어렵다.
유일하게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적극적 태도로 긍정적인 답을 했는데, 그것은 ‘믿음의 응답’이다. 그 믿음의 응답을 하기까지 베드로는 주님 말씀을 잘 듣고 믿었다. 그 결과 그는 ‘말씀의 성취’ 및 ‘영과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기 때문이며(요한 6,61-62 :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주님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기 때문이다.(요한 6,63 :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결국 주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영과 생명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제자들에게는 결정적인 갈림길이 있다.


- 제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스켐 집회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에게 주님을 성실히 섬길 것인지 아닌지 여부를, 오늘 (현재)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백성은 모두 주님을 섬기겠다고 고백하며 선언한다.


- 제2독서는 그것을 주님께 대한 순종을 근본으로 하면서, 부부간에서 서로 사랑과 순종으로 일심동체가 될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주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길은 인간관계 안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이 길 또한 신앙인이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하는 것이다.
 

2) 베드로가 한 믿음의 응답을 들여다 보자. : 요한 6,68-69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 안에는 아래의 세 가지 영성적 내용이 담겨있다. 첫째, ‘주님 현존 안에 머물기’, 둘째, 주님의 ‘영원한 생명 말씀’을 듣기, 셋째,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믿기와 알기’, 제자의 길을 제대로 걷는 이는 위의 세 가지 차원을 살게 된다.
가) 전례기도, 개인 기도와 묵상 등으로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기, 나) 말씀에 대한 공부와 묵상과 기도로써 말씀과 영의 생명을 얻어 누리기, 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받아들여 믿고, 믿음으로써 알기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3. 말씀을 듣고 믿고 고백하는 자, 예수님 곁에 남은 자가 되라.
요한 6,63-64 주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 나는 베드로처럼,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믿음과 순종으로 고백(응답)하고 영과 생명을 얻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 아직 믿음의 응답을 하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과 질문 앞에 묵묵부답으로 침묵할 것인가?
- 나의 상식이나 나만의 지식과 고집에 근거해서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떠날 것인가?
- 나의 야심과 이익을 위하여 주님을 팔아넘기는 유다처럼 처신할 것인가?

 

 

 

8월 30일 연중 제22주일 : 마르 7,1-8. 14-15. 21-23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1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1. ‘하느님의 계명’을 ‘식별하라!’ 그리고 ‘지켜라, 실천하라!’
예수님은 사람의 전통과 하느님의 계명을 구별하지 못하는(혹은 않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일침을 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신앙의 본질임을 가르치신다.
1) 대원칙 : 하느님 계명 실천하기(제1독서) : 모세는 신명기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하느님의 말씀(법, 계명, 규정, 긍정적 의미의 율법)을 경청하고 준수하고 실천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최고의 지혜와 슬기를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신명 4,1-2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님의 법(말씀, 명령, 법규, 규정)을 실천하라. 4,6-8 너희가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들을 듣고 말하게 될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위대하다’는 것과 ‘이스라엘이 가진 지혜와 슬기가 탁월하다’는 것을 칭송할 것이다.

 

 

2) 식별 기준 배우기(제2독서) :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세상의 지혜나 지식, 자신의 주관이나 신념, 자신의 권력이나 지위나 명예 등을 앞세우는 경우들을 만나기도 한다. 여기에 야고보서는 참 좋은 식별의 빛을 던져주며, 공동체가 선으로 충만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 야고 1,17-18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21-22…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가) 첫째 식별 기준 : 모든 선은 위로부터-빛의 아버지께로부터 근거해 있다.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신학적 사고가 유행하고, 교회 중심보다는 현장 중심의 사조가 만연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관점은 불필요한 인간 억압을 해소하고 자유롭게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게 돕는 큰 장점이 있다. 또 대사회적으로는 교회가 사회적 약자들을 잘 지켜보고 지켜주지 못한 점들을 반성하게 하고, 여전히 새로운 관심과 헌신이 부족했던 약점들을 깨우치게 해 준다. 그러나 만약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과 끝을 아래로부터만 그리고 아래에서만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입장이 아니다. 인간이 자기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 놓고, 하느님의 축복을 비는 수가 많지만, 보다 그리스도교적인 태도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기도하며, 준비에서부터 시작과 진행 그리고 완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민주주의가 인류를 구원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하느님은 아래로부터의 고통과 아우성 소리를 외면하신 적이 없다. 아벨의 피와 심지어 살인자 카인의 하소연(창세 4,10-12.14-15), 이집트의 백성들의 억압받는 고통과 아우성(탈출 2,23-25), 먹고 사는 문제의 호소와 해결(탈출 16,1-17,7; 민수 11,7-9),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치적 민주적 발상의 왕 요구(1사무 8,22) 등을 하느님은 받아들이셨다. 그러나 우상숭배(탈출 32장)를 비롯하여 내면의 탐욕으로 무장한 현실 부정과 불평불만은 용서하지 않으셨다.(민수 11장; 14장; 16장; 21장) 그러나 은혜롭게도 하느님의 진노로 처벌이 있을 때마다 지도자의 기도가 백성을 구제하였다.(탈출 32,30-35; 민수 11,2; 12,13-15; 14,10-25; 21,7-9 등)
교회는 휴머니즘적인 태도를 마지막 최선으로 여기지 않는다. 인간애를 포함하고도 초월한다. 무엇보다도 ‘구원의 말씀으로써’ 시작부터 끝까지를 관통시키며, 위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생명을 세상에 나누어주고 증거 할 본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경계하고 주의할 것은, 때로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인들의 실천이 휴머니즘적인 선행을 따라가지 못할 때도 있고, 때로는 휴머니즘만이 남고 (기도와 믿음을 선행하고 동반하는) 그리스도교적 선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최근엔 교회의 복음적인 관점에서의 대사회적 관심과 참여가 절실히 요청되는 시기다. 다만 복음적 본질에 대한 확고한 입장과 현실 사회의 다양성 안에서 균형 감각이 요청된다.

 

나) 둘째 식별 기준 : 말씀의 원리로 풀어나가라.
우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마르 7,14) 주님의 말씀을 아예 듣지 않거나, 듣기만 하고 깨달음이 없거나, 듣고도 실천이 없는 신앙생활도 있을 수 있다. 흔히 성경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의 수준이나 양과 질을 따지지 않는다. 다만 이미 심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야고 1,21-22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할 말씀의 힘을 믿어야 한다. 자신의 무지함을 무기로 내세우며 태만해서도 안 되지만, 자신의 지식이나 논리와 주관에 매달려 있어서도 안 된다. 주님의 사업을 이끌어 가시는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주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 안에서 비전과 성장과 정화 능력을 갖추게 해 주신다. 주님의 공동체도 사람의 세상이라 문제는 항상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복음은 배제되고 지나치게 리더의 주관에 좌우되는 경우가 있다. 당장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르나, 장차 공동체의 더 큰 위협이 된다. 지도자는 주관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중심은 자기 자신(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며, 하느님 말씀이 비전 제시와 개척 그리고 문제 분석과 해결을 해 나가도록 협조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주 하느님께 완전한 예배를 드리는데 있기 때문이다.

 

다) 셋째 기준 :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돌아보고, 자신을 관리하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15)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마르 7,21-22) 복음적인 자기 관리법은 스스로가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말씀의 빛과 힘을 받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비우고 통째로 내어맡겨, 하느님의 현존과 영과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복음적 실천으로 비전을 성취하고 열매를 맺는데 달려있다.

 

2. 비전의 성취,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열매 맺기
1) 신명 4,1에 의하면, 주님의 ‘말씀 듣기’는 ‘실천’을 위한 것이며, 이 실천은 ‘약속의 땅을 차지(비전의 성취)’ 하는 방법이다.


2) 신명 4,2-4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명령말씀을 지켜야 하는데(4,2), 그 이유는 주님께서 하신 일을 보았기 때문(4,3)이며, 그 때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그 결과로 지금 살아있다.(4,4)
 

3) 다른 한편 신명 4,5-6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명령말씀을 지켜야 하는데(4,5-6ㄱ), 그 이유는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성취해 주신 지혜와 슬기를) 알아보고 체험적으로 알아듣게 하기 위함(4,6ㄴㄷ)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위대한 비전을 성취하는 방법(4,1)이며, 위기 속에서도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는 원리(4,2-4)이고,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알아보고 알아듣도록 증거 하는 최선의 길(4,6)이다.


* 심탁(끌레멘스) 신부는 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사제로 사목하고 있습니다.